▲운동회 모습 운동회를 하기 위해 운동장에 모인 6학년 어린이들
박상희
부모님 참석은 자율이다. 딸과 사위는 직장 일로 참석이 어렵다고 하여 내가 대신 가겠다고 나섰다. 땡볕에서 힘들 거라며 말리는 딸 말은 아랑곳 하지 않고 간편한 청바지와 편한 신발을 신고 선글라스, 양산, 물과 이온음료까지 싸 들고 출발했다.
목청껏 응원이라도 해줄 요량으로 급히 갔지만, 들어선 운동장에는 이미 입장식이 끝나고, 아이들과 학부모의 함성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하늘은 푸르고 만국기가 펄럭이는 운동장을 보며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산 넘고 물 건너 왕복 두 시간이나 걸리는 초등학교에 다녔다. 가을이 되면 어김없이 인근 지역 주민까지 참석하여 운동회를 했다. 그러나 농사일로 바쁘신 부모님은 그날도 자식들 끼니를 위해 새벽부터 들판으로 나가시고, 할머니께서 대신 오셨다.
초라한 도시락으로 꾸역꾸역 배를 채우고, 부채춤을 추고, 줄다리기와 콩주머니 던지기도 했다.
"청군 이겨라! 청군 이겨라!"
목이 터질 듯이 응원하다 공책 한 권이라도 받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나는 키도 작고 마른 편이었지만 제법 달리기를 잘하는 편이었다. 언제나 반에서 1등을 하고, 어른들과 한 조가 되어 마을별로 하는 달리기에서도 첫 번째 주자로 달려 격차를 벌리며 우리 마을이 우승하는 데 기여했다.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청백 계주다. 하필 내가 청팀의 6학년 마지막 주자였다. 스타트가 주특기인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함께 뛰는 백팀 주자는 나보다 키도 크고 더 잘 뛰는 친구였다. 피가 마른다는 말은 그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바통이 내 손에 쥐어지고 간발의 차이인 그 시점에서 앞자리를 내어줄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무아지경으로 달렸다. 드디어 결승 테이프가 눈앞에 보였다. 그 다음은 생각나지 않는다. 잠시 정신이 나갔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평소 나는 그 친구를 이겨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힘이 작용하여 결승점을 통과할 수 있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함성이 들리고, 내가 지고 있던 청팀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사실에 기뻐할 수 있었다.
비누, 치약, 수건, 공책, 연필 등의 상품이 할머니 품에 안기고 나는 그날의 스타가 되었다. 오래된 플라타너스 잎이 곱게 물드는 교정에서 춤을 추던 만국기마저 나를 축복해 주는 듯했다.
나를 붙잡고 뛰자는 아이들
오늘 불현듯 그날이 떠오르며 들뜬 마음으로 아이들의 경기를 응원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 시간이 또 올 줄은 몰랐다. 피구 경기와 공 파도 타기, 팔자 줄넘기가 끝나고 '손님 찾기 달리기'가 시작된 것이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들고 있는 스케치북에 쓰인 미션대로 학부모와 함께 달리는 경기였다. 미션은 청바지를 입으신 분, 여자 어른, 나보다 키가 큰 분, 선글라스를 끼신 분, 양산을 쓰신 분 등 다양하면서도 어렵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래도 이 나이인 나를 선택하겠나 싶어 뒤쪽에서 편안히 즐기려던 참이었다. 웬걸, 정신없이 달려온 남자아이의 애절한 눈빛에 뛰지 않을 수 없었다. 들고 있던 양산을 집어 던지고 정신없이 달렸다. '나 아직 살아있는 거지!'
2등으로 달리고 있던 그 아이의 자리를 지켜주기 위해 끝까지 달렸다. 선물은 손등에 찍힌 '2등' 도장. 마침 윤이 반 앞이라서 손등을 높이 치켜들고 "할머니 달리기 했어!" 하며 자랑했다. 멀어지는 아이들 함성을 들으며 부끄러워 또 달렸다.

▲2등 도장 달리기를 하고 받은 선물
박상희
문제는 그 뒤로도 또 달렸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여자 아이였다. 분명 뒤로 물러나 있었는데 어느새 앞에 있던 학부모들이 슬금슬금 사라지고 내가 선택된 것이다. '그래 오늘 이 한 몸 불사르자.' 그 아이에게도 2등이라는 선물을 꼭 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오늘의 달리기를 기억했으면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내 발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결승점을 통과하고 도망치듯 자리로 돌아왔다. 도저히 그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육십 대 중반이 넘은 내게 두 번의 달리기는 무리였다.
이어 마지막 경기로 청백 계주 대신 반 대표들이 나와 3조로 나누어 달리고, 1승을 한 세 팀이 다시 모여 결승전을 했다. 마지막 주자가 결승 테이프를 끊는 장면을 보니 그날의 풍경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5월 8일 어버이날에 아들, 딸이 준 그 어떤 선물보다도 손자와 함께 한 운동회가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날의 두 번 달리기로 주말 이틀 동안 힘들었다. 안 쓰던 허벅지 근육이 놀랐는지 걷는 것조차 불편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달리며 나의 건재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1등이 아니어도 괜찮다. 내 손을 잡고 달린 그 아이가 오늘의 2등을 기억하며 건강하게 잘 자랐으면 좋겠다.
달리는 할머니를 보며 기뻐했을 손자를 생각하면 며칠의 아픔 정도는 이겨낼 수 있었다. 윤이도 나도 추억을, 젊음을 선물 받은 오늘을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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