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회 백상예술대상 방송부문 대상을 수상한 류승룡 배우 유튜브 '백상예술대상' 캡쳐, 수상소감을 말하는 류승룡 배우
백상예술대상
지난 8일 열린 제62회 백상예술대상에서 많은 수상 소감들이 화제를 모았다. 그 중 유독 마음에 오래 남는 건 방송부문 대상을 수상한 류승룡 배우의 말이다. 그는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속 주인공 '김낙수'를 이야기 하며 이렇게 말했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는 평생 어렵게 올라간 그 자리에서 떨어지는 50대 중년 남성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김부장은 화려하고 긴 제목에서 나왔던, '서울 자가', '대기업', '부장'이라는 타이틀을 다 잃고 결국 김낙수 자신만 남게 되는 이야기죠. 낙수(落水) 이름도 떨어지는 물입니다. 그 물이 떨어지면 모든 것이 끝장날 줄 알았는데 그 물이 흘러 시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고 또 바다로 흐르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울컥했다. '떨어지는 물'이라는 의미의 김낙수. 처음에는 그 이름이 너무 쓸쓸하게 들렸다. 사회적으로 밀려나고, 익숙했던 자리에서 내려오고,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가 되는 듯한 감정. 아마 많은 50대들이 한 번쯤은 그런 두려움을 느껴봤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떨어진 물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흐르기 시작했다. 시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고 결국 바다로 향한다. 그것은 단순한 이름의 해석이 아니라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중년들에게 건네는 위로처럼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요즘 우리 주변에는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누군가는 회사를 떠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누군가는 오래 품어왔던 꿈에 도전한다. 또 누군가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새로운 길 앞에 서게 된다. 이유는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모두가 불안 속에서 다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2026년, 쉰을 맞이한 나 또한 그렇다. 나는 20년 넘게 방송작가로 살아왔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치열하게 달려온 시간이었다. 하지만 방송작가는 누군가를 빛나게 하기 위해 늘 바쁘게 움직이지만 정작 자신의 이름은 뒤로 밀려나는 직업이다.
어쩌면 엄마들의 삶도 비슷하다. 아이의 이름으로 불리고, 누군가의 아내로 살아가다 문득 '나 자신의 이름'을 되찾고 싶어지는 순간이 온다. 나 또한 방송작가 일을 하며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이야기들을 다루었지만 내가 쓴 글은 대부분 DJ와 MC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졌다. 방송이 끝나면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말들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내 이름으로 남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새로운 길을 고민하며 나는 아이들과 읽고 쓰는 수업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방송작가 일을 마무리하며 '내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결국 동화를 쓰기 시작했고, 그렇게 동화작가라는 새로운 길 앞에 서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했을 삶이다. 한 분야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이 갑자기 다른 세계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지난달에는 <오마이뉴스>에서 내 이야기를 기사로 소개해주었다. 20년 넘게 방송작가로 일하던 사람이 인생 2막을 준비하며 새로운 삶에 도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기사가 나간 뒤 이번에는 한국방송작가협회에서도 연락이 왔다. 인생 2막을 준비하는 후배들을 위한 인터뷰 요청이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정말 지금 우리 시대의 화두는 '인생 2막'이구나. 특히 50대는 참 묘한 나이다. 분명 오랜 경험과 경력이 있다. 젊은 시절에는 몰랐던 삶의 지혜도 생겼다. 사람을 보는 눈도 넓어졌고, 세상을 견디는 힘도 커졌다.
하지만 동시에 체력은 예전 같지 않다. 새로운 도전을 하기엔 늦은 것 같고, 그렇다고 멈춰 있기에는 아직 살아갈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더 흔들린다. 나는 끝나가는 사람인가, 아니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인가.
예전에는 쉰이라는 나이가 인생의 후반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는 백세 시대다. 쉰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점에 가깝다. 오히려 인생의 방향을 다시 선택해볼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하다. 드라마 속 김낙수가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는 화려한 타이틀을 잃는다. 서울 자가, 대기업, 부장이라는 사회적 이름들이 사라진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결국 '김낙수'라는 한 사람 자체였다.
우리 역시 그렇지 않을까. 살아가다 보면 직함도 변하고 역할도 바뀐다. 부모라는 이름도, 직장인이라는 이름도 언젠가는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끝까지 남는 것은 결국 한 사람의 삶이다. 그래서 인생 2막은 단순히 새로운 직업을 찾는 문제가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다시 묻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물론 쉽지는 않다.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특히 50대에는 체력이 중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낀다. 젊을 때처럼 밤을 새워 무언가를 밀어붙일 수 없다. 조금만 무리해도 몸이 먼저 신호를 보낸다. 나 역시 글을 쓰고 수업을 준비하고 새로운 일을 구상하다 보면 쉽게 지치곤 한다. 그래서 요즘은 더 많이 생각한다.
인생 2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지속하는 힘이라는 것을. 시냇물이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물은 조급해하지 않는다. 멈추지 않고 그저 계속 흐른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그런 태도인지 모른다. 류승룡 배우는 수상 소감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전국의 낙수야, 행복해라."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따라 말했다.
"수고했다."
치열하게 버텨온 지난 시간의 나에게. 그리고 지금도 인생 2막 앞에서 흔들리고 있을 전국의 수많은 김낙수들에게.
우리는 떨어지는 물이 아니다. 다시 흐르기 시작한 물이다. 조금 늦더라도, 조금 천천히 흘러가더라도 결국 자신만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오늘도 인생 2막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 전국의 김낙수들에게, 나 또한 류승룡 배우처럼 전하고 싶다.
"괜찮다. 그리고 행복해라."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20년 동안 방송작가로 활동했다. 제주MBC, 아리랑국제방송, 제주 TBN교통방송 등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했으며 현재는 아동문학 작가이자 글쓰기 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이자 브런치 작가로 글을 쓰며, 유튜브 채널 '작가의식탁 이효진'을 통해 초·중등생들의 교육 콘텐츠와 작가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공유하기
50대에게 위로가 된 류승룡 배우의 수상 소감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