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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역 앞 원도심에서 저녁마다 벌어지는 일...모두 놀랍니다

[우리 동네 진짜 이슈] 도시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 먼저다

등록 2026.05.14 06:58수정 2026.05.14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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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에 산 지 4년하고 석 달째다. 서울에서 태어나 40년 넘게 줄곧 서울·수도권 대도시에서만 살다 저출산·고령화와 이른바 '지역 소멸' 문제에 관심이 생겨 아는 이 하나 없던 낯선 도시로 옮겨왔다.

1년쯤 지나 익산역 앞 옛 삼남극장 골목에 작은 책방을 냈고, 그 2층에 널찍한 복합문화공간을 열어 한 달에 두세 번씩 크고 작은 강연이며 대담을 열고 있다. 지난해 12월엔 이 도시에서 청춘을 보냈던 윤흥길·박범신·안도현 세 작가를 초대해 '2025 익산 문학의 밤'을 열기도 했다.

처음엔 '익산'이란 이름조차 낯설었다. 이곳이 어릴 적 교과서에서 본 '이리' - 1970년대에 마산에 이어 우리나라 두 번째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된 바로 그 도시 - 였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1995년, 이리시와 익산군이 합쳐져 익산시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 글은 경계인의 글인 셈이다. 아직은 날마다 마주치는 많은 것들이 낯설고, 그래서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러 온 이들과는 다른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보는 경계인.

경계인이 바라본 도시 '익산'

지금의 익산역 주변 도심이 옛 이리시였다. 1990년대를 넘어가면서 도심의 기능이 조금씩 새로운 곳으로 옮겨 갔으니 지금은 원도심이란 말이 더 어울리겠다. 1912년 호남선 철길이 이곳을 지나게 되고 허허벌판이던 곳에 기차역(옛 이리역)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도시 '이리'가 탄생했다. 도시는 빠르게 번성했고, 한때는 호남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1980년대 익산역 앞 풍경. 멀리서 기차를 타고 익산으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1980년대 익산역 앞 풍경. 멀리서 기차를 타고 익산으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익산시

목포로 가는 호남선에 여수로 뻗어가는 전라선이 더해지면서 더 많은 사람과 물자가 모여들었고, 옛 이리는 상업과 금융 그리고 문화와 교육의 도시로 자리매김해갔다.


"강경을 지나면 함열버틈(부터) 전라도니라. 함열, 황등, 이리 그런데, 전라도루 들어서 이리가 젤 크니라. 클 뿐 아니라 전라남도루 가는 것이 아니구, 전라북도루 가서 농사할 고장을 찾는다면 누가 됐던, 이리서 내리는 게 순설 거다."

채만식은 소설 <소년은 자란다>에서 옛 이리를 부푼 꿈을 안고 사람들이 모여들던 도시로 그리고 있다. 몸뚱이만 부지런히 놀리면 누구라도 먹고 살 만한 곳, 이곳은 정말로 그런 도시였다.

돈과 물자가 모여드는 만큼 주먹 쓸 일도 많았고, 그래서 역 주변엔 늘 '어깨들'이 무리 지어 다녔다고도 한다. 지금도 옛 이리를 '어깨들의 도시'로 기억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나가 이리에서 곤조로 이름 석 자 날린 놈이여."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파인: 촌뜨기들>(2025)에서 느닷없이 '이리'가 튀어나온 건 바로 그래서다. 대놓고 자랑할 만한 기억은 아닐지라도 한때나마 이 도시가 얼마나 번성했는지를 보여주는 흔적인 것만은 틀림없다.

익산 만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1990년대 들어 도심 바깥으로 넓게 펼쳐져 있던 논밭을 택지로 바꾸는 작업이 시작됐다. 머지않아 값싼 땅 위에 값비싼 아파트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IMF 외환위기로 잠시 주춤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올라간 아파트들이 앞다퉈 팔려나가면서 도시는 덩치를 키웠고 사람들의 자부심도 커졌다. 어느 도시에서나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하지만 그사이 원도심 인구는 10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밤에도 꺼질 줄 모르던 가게들의 불빛도 하나둘 꺼져갔다. 도시가 생긴 지 거의 10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잠시 늘어나는 것처럼 보이던 익산시 인구도 1999년 33만 6000명까지 늘어난 뒤 줄곧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지난해 익산시 인구는 26만 7000명이었다.

 익산역 앞 골목 풍경
익산역 앞 골목 풍경 윤찬영

원도심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 번화했던 옛 거리에 '문화예술의 거리'란 이름을 붙이고 수백억 원을 들여 예술인들과 청년 창업가들을 불러들이는 도시재생 사업도 벌여봤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한 번 사람들이 빠져나간 원도심을 되살리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익산역 앞 원도심은 저녁이면 불 켜진 가게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고요하다.

그래도 다행인 건 지금도 익산역이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익산역은 여전히 호남에서 가장 바쁜 역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호남(고속)선과 전라선, 장항선이 만나는 익산역엔 주말이면 여객열차만 하루 234회가 지나고, 2만 2000명 넘는 사람들이 타고 내린다. 인구가 익산보다 두 배 넘게 많은 이웃 도시 전주에 견줘도 세 배나 많은 수다. 그래서 전주국제영화제 같은 큰 행사가 열리면 익산역도 덩달아 바빠지곤 한다. 하지만 딱 그뿐이다.

내년이면 익산에 철길이 놓인 지 꼭 115년이 된다. 1950년 이리역 오폭 사고와 1977년 이리역 폭발 사고의 아픈 기억 탓일까, 익산역 앞 원도심에서조차 이곳이 철길 위에 세워진 도시라는 걸 보여주는 그 어떤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마치 애써 그런 흔적을 지워오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익산은 정체성이 흐릿한 도시다.

도시의 정체성이 브랜드가 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브랜드가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시대다. 도시의 실체는 엄연히 존재하며 그 실체를 바꾸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기차역을 통틀어 익산역만큼 이야깃거리가 많은 역이 또 있을까. 그래서 익산 원도심, 나아가 익산 만의 오롯한 정체성과 도시 브랜드는 철길 위에서 찾아야 한다.

 익산역의 야경
익산역의 야경 서태멘

큰돈을 들여 익산역의 덩치를 키우고 복합환승센터로 바꾸는 일도 필요하겠지만, 그런다고 정말 원도심이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지금처럼 익산역을 거쳐 전주로, 군산으로 빠져나가기만 더 쉬워지는 건 아닐까.

그래서 익산 만의 개성과 가치관이 담긴 도시 브랜드를 만드는 일이 먼저여야 한다. 그리고 그 브랜드에 어울리는 거점 공간을 원도심에 한두 개라도 만들어 내야 한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원도심의 빈 건물들을 사거나 빌려 조금만 손 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로컬에서 정체성 찾기는 '나를 잘 들여다보기'에서 출발한다. 브랜딩이 잘된 다른 도시를 벤치마킹한다고 해서 그 도시의 정체성이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사람들이 얼마나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느냐가 성공과 실패를 가른다... 이 정체성 찾기가 도시 리브랜딩의 시작이다. 죽은 도시에 숨을 불어넣고 도시와 국가를 넘어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는 든든한 초석이 된다." (<도시×리브랜딩>(박상희 외, 227쪽)

익산역에 내려 동쪽 광장 위에 서면 멀리까지 번듯한 4차선 도로가 뻗어있다. 이리역 폭발 사고가 일어난 뒤 새로 뚫린 '중앙로'다. 그리고 길 건너 2층에 걸린 커다란 'OO보청기'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는 이 도시의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적 풍경이라고 했다.

부디 이번 선거에서 나를 잘 들여다볼 줄 아는 리더가 뽑혀 익산역 앞 원도심이 오롯한 정체성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 그러려면 우리부터 먼저 그래야 하지 않을까.
#익산 #익산역 #원도심 #지방선거 #익산중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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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북카페 기찻길옆골목책방'과 '문화살롱 이리삼남극장' 운영자. 최근 여행사 '한레일트래블'도 창업했다. 서울/수도권에서만 살다 2022년 전북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 혁명>, <로컬꽃이 피었습니다>,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 <나는 시민기자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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