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등록 2026.05.13 11:02수정 2026.05.13 11:02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작년 구에서 운영하는 공용 텃밭을 분양받아 텃밭 가꾸는 재미에 발을 담갔다. 올해는 운이 따르지 않아 땅을 받지 못했다. 아파트 베란다에서라도 조그맣게 키워보자는 남편에게 절대 안 된다고 큰소리를 쳤다. 창문도 자주 열어 줘야 하고 물과 퇴비도 줘야 한다. 솎아주고, 바닥에 떨어지는 흙과 마른 잎을 정리하고... 성가신 일이 늘게 불 보듯 뻔했다. 그랬는데 남편이 일을 벌였다.
여행으로 며칠 집을 비웠다 돌아와 보니 베란다에 못 보던 화분이 놓였다. 하얗고 기다란 플라스틱 화분에 바질 모종 여섯 개가 심어 있다. 눈앞에 벌어지기 전에는 걱정거리만 떠올랐는데 막상 화분을 보니 초록빛의 바질이 사랑스러웠다. 이 정도는 해볼 수 있겠다 싶어 슬금슬금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남편에게는 당신이 저질렀으니 책임지라고 신신당부했다.
인생의 우연이란 참 기묘하다. 베란다에 계획에 없던 화분이 등장한 즈음 올해 새로 가입한 독서 모임의 첫 회가 열렸다. 눈여겨보던 일인 출판사 편집자님이 진행하는 독서 모임. '식물'을 주제로 한 달에 한 권, 총 여섯 권의 책을 읽을 예정이다.
쉽게 생기지 않은 당당함

▲<햇볕이 아깝잖아요> 나의 베란다 정원 일기, 야마자키 나오코라, 정인영 옮김, 샘터사
알라딘
첫 책은 일본 소설가 야마자키 나오코라의 <햇볕이 아깝잖아요>(2020년 3월 출간). 일본의 좁은 아파트에 살면서 베란다에 정원을 가꾸었던 작가의 경험이 적힌 에세이집이다. 관상용 식물뿐만 아니라 식용 작물까지 가꾼 이야기라 단번에 나의 흥미를 사로잡았다. 베란다 정원이라니, 내가 막 발을 담그기 시작한 그 세계가 아닌가.
글을 쓰며 하루 종일 실내에 머무는 작가에게 집을 고르는 조건은 두 가지였다. '전망이 좋을 것, 시끄럽지 않을 것.' 그렇게 고른 집의 베란다에서 맥주를 마시고 하늘을 바라보던 작가는 여행지에서 우연히 사 들고 온 드래곤프루트를 시작으로, 히비스커스, 올리브, 부겐빌레아를 키우게 된다. 서서히 먹기 위한 식물로 확장해 허브류와 방울토마토, 여주와 풋콩, 딸기와 자몽, 아보카도에 이르게 된다.
저자는 정원을 가꾸며 얻은 생각이나 자신의 호불호를 책에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삶에는 생존이 전부가 아니듯, 베란다에도 '목적'이 전부가 아니다", "가드닝은 잔혹함이 없으면 하기 힘든 작업이다", "혼자 힘으로 서지도 못해서 지지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주제에 당당하다 (...) 어쩐지 나는 그 뻔뻔함이 좋다", "인간은 먹고사는 게 전부가 아니다. 쓸데없는 데 돈을 쓰는 존재야말로 인간이다"와 같은 문장은 명쾌하면서 재미있다.
저자의 솔직함이 유머와 재치로 느껴지고, 당당함으로 다가온다. 나도 당당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즈음, 저자의 당당함이 쉽게 생긴 게 아님을 확인한다. 척박한 땅에서 자란 식물이 더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듯 작가의 내면도 시련을 통과해 무르익었음을.
저자는 베란다 정원을 가꾸는 동안 일과 삶 모두에서 부침을 겪는다. 뱃속의 아이와 아버지를 잃는다. 하지만, 괴로움에 짓눌리거나 조급해하는 대신 담대하게 변화를 기다린다. 때가 올 것을 믿으며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킨다. 이 또한 식물을 통해 배운 자세다.
힘들 때는 잎을 떨구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다. 인간에게도 괴로운 시기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절대 죽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 다독여보는 건 어떨까. 언젠가 다시 따뜻한 볕이 들고 선선한 바람이 다정하게 찾아올 테니, 일이 잘 안 풀릴 때는 손에 쥐었던 욕심을 내려놓고 조용히 지내면 된다. - 95~96쪽, <햇볕이 아깝잖아요>, 야마자키 나오코라
다양한 음악에 섞여들기
인간사와 상관없이 식물은 자신의 시간을 꿋꿋하게 살아낸다. 우주의 법칙에 따라 피고 지는 일을 성실하게 반복한다. 그런 식물의 시간을 바라보며 저자는 인간이 지닌 시간 감각과 시선의 협소함을 발견한다.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내는 식물, 꾸준히 돌보면 기필코 피어나는 식물을 통해 작가는 삶에 대한 믿음을 다진다. 그런 저자의 모습이 내게도 뭉근한 힘을 건넨다.

▲나의 베란다 텃밭 기다란 화분에 바질과 상추, 방울 토마토를 심었다
김현진
책을 읽고 나자 저자가 통과한 시간을 가까이서 경험하고 싶어졌다. 남편이 사다 놓은 바질 화분이 마음에 들어 두 개를 더 주문했다. 비록 기다란 화분 세 개에 바질과 파슬리, 상추 대여섯 개와 가지 하나, 오이 두 개가 전부지만, 무럭무럭 자라겠지. 이 작은 정원에서 지구의 회전을 느끼다 우주의 법칙을 발견하려나.
나는 지구의 회전을 느끼고 싶다. 나 자신의 덧없음을 느끼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정원을 만들고 강가를 산책한다. 어쩌면 육아 역시 그 연장인지도 모른다. 내 타이밍과 상관없이 아이가 태어나고, 내 리듬과는 다른 리듬으로 성장해서 제멋대로 내 음악을 흐트러뜨린다. 그런 불협화음 속에서 오히려 나는 편안함을 느낀다. 나 혼자 연주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음악이 넘쳐나고 있으니 다양한 음악에 섞여 들면 된다.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정원도, 강물도, 아이도 각자의 흐름으로 계속 변한다. - 219쪽
나도 육아를 하면서 저자와 유사한 과정을 거쳤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좌절을 거듭하다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 힘과 상관없이 유유히 흘러 그런대로 풀리는 일과 관계를 겪으며 서서히 평온해졌다. 그래서일까, 다양한 음악에 섞여들면 된다는 저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정원도, 아이도, 삶과 글쓰기도, 저마다의 흐름으로 계속 변하는 중일 테다.
햇볕이 아깝잖아요 - 나의 베란다 정원 일기
야마자키 나오코라 (지은이), 정인영 (옮긴이),
샘터사, 2020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작은 목소리로 소소한 이야기를 합니다. 삶은 작고 작은 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공유하기
며칠 집을 비우고 돌아오니 베란다에 못 보던 게 놓였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