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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에 타지 않고 여름을 보내는 방법

[시로 읽는 오늘] 연정모 '오층'

등록 2026.05.21 09:01수정 2026.05.21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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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작가회의 시분과위원회에서 기획한 '시로 읽는 오늘'을 연재합니다. 시로 아침을 시작한다면, 수많은 갈등과 전쟁도 줄어들 것입니다. 독자들은 힘 있는 언어를 익혀 튼튼한 내면을 가꿀 수 있고, 다양한 시를 통해 새로운 시민의 감수성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의 첨예한 문제를 시인의 예민한 감각으로 길어 올린 한국시를 매주 두 편씩 선정하여, 추천 글과 함께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기자말]
오층
- 연정모

벌거벗은 유령과 이불 빨래를 한다
여름 아침은 무얼 희게 말리기에 좋다
이번 여름은 더웠고
자주 잠이 왔다
유령과 나는 이불을 공유했다 해가 지면
나는 그 애의 피부 아래로 들어간다
유령의 밥때를 챙기는 것과 투명하게 조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밤이 왔다 안전하게
유령은 흰색이 섞이면 뭐든 잘 먹었다 가리지 않고
우유를 많이 넣은 카페오레와 탕종식빵이 주식이었고
너그럽고 싶어질 땐 크림치즈
크림치즈를 두 통 비웠을 땐 온통 꾸덕해져
밤중에 울면서 나를 깨운 일도 있었다
살이었던 것이 물크러져 이불에 들러붙는다고
녹는다고
녹아서 흡수된다고
나는 질량과 부피를 가진 손가락으로 이불을 걷어
몽당초만 해진 유령을 꺼냈다
이불이 더러워졌잖니
핀잔을 들은 유령은 쌀알만 해지고
나는 쌀통에 유령을 넣는다
실컷 울 수 있도록 내버려둔다
그 안에서 희고 조용한 것들을 다 먹고 나면
나의 유령은 새벽이 오는 속도처럼 자라
마른 이불 아래로 들어왔다


나는 나를 발설하는 법이 없다
햇볕에 타지 않고 여름을 보냈다

출처_ 시집 <조금 깨물고 몰래 버리기>, 아침달
시인_연정모: 2024년 <문학수첩>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조금 깨물고 몰래 버리기>가 있다.

 유령처럼, 발설 없이 지나간 여름
유령처럼, 발설 없이 지나간 여름 박유하 시인(디지털 포엠 아티스트)

추천글

볕에 타지 않고 여름을 보내는 방법이 여기 있다. 나는 유령과 이불을 나눠 덮고, 그 애의 밥 때를 챙기고, 밤중의 울음까지 받아낸다. 유령은 흰 것들을 먹으며 자란다. 녹아내려 쌀알만큼 작아졌다가도, 쌀통 속에서 어느새 다시 자라 마른 이불 아래로 돌아오는 유령. 이 이상하고도 다정한 돌봄의 장면 속에서 유령은 두려운 존재가 아닌 간신히 곁에 머물게 한 마음에 가깝다. 여름은 쉽게 들러붙고 물크러질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희고 투명하고 유연한 모습을 지켜냈다. 세상에 나를 드러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저항이 있다면 이런 방식이 아닐까. 오는 여름밤에도 나는 마른 이불을 들춰 이 친밀한 유령을 맞이할 것이다. (배수연 시인)
#연정모시인 #오층 #조금깨물고몰래버리기 #한국작가회의 #시분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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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국작가회의는 이 땅의 대표적인 문인단체로서 표현의 자유와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정신을 계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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