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천 세성산 목천 세성산 전경이다. 이 사진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동학혁명기념관
우금치에서 패배한 동학군은 10월 중순 논산에 집결하여 일부의 병력을 후방에 배치하여 적의 침략에 대비하고, 주력 부대는 관군과 일본군이 지키고 있는 공주성을 점령하고 곧장 서울로 쳐 들어갈 계획이었다.
비록 전투에는 패배하고 많은 희생자를 냈으나 의기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동학농민혁명군이 논산에 집결할 무렵에는 여러 지방에서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일본군은 부산·인천 등 개항장을 비롯하여 내륙 각지로 침입하여 청·일전쟁을 위한 병참기지를 확보하고, 병력을 배치시키는 한편 부산에서 서울까지 전신선을 가설하였다. 각처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병참기지를 습격하여 군용전신선을 끊어 후방을 교란시켰다.
전봉준은 10월 16일 일거에 공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각 군의 두령들을 모아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0월 20일 미명에 논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공주의 경천점을 향하여 진격케 하였다. 전봉준이 거느린 정예부대가 앞장섰다.
동학농민군의 좌익은 이인역 방향으로, 우익은 노성읍을 거쳐 효포길로 쳐들어갔다. 공주와 청주로 통하는 요충지인 목천 세성에는 북접 산하의 김복용이 거느린 동학농민군 부대가 포진하고 있었다. 2만 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군산에서 공주에 이르는 만선평야를 거쳐 충청도의 수부(首府)인 공주를 위협해 들어갔다. 동학혁명사상 남북접 연합군이 합동작전을 편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 때 공주에는 관군 이의태가 인솔하는 부대가 770명, 후속 경리영·순무영·통위영 등의 병사 2,500명, 일본군 2,000명, 지방군 등 1만 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관군측은 목천 세성산을 먼저 공격하자는 주장과 공주가 함락되면 충청도 전체를 잃게 된다는 공주선공론으로 대립하였다. 결국 주력부대는 공주에 포진키로 하고 이두황 부대의 관군과 일본군의 일부 병력으로 목천 세성산의 동학농민군을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세성산은 천안시 목천읍의 남쪽에 자리잡은 산으로, 공주와 청주의 중간에 위치하여 서울로 통하는 중요지점이다. 산의 북서쪽은 급경사의 높은 지대로 접근이 어렵고, 동남쪽은 밀림으로 천연의 요새이다. 동학농민군은 산 정상에 진막을 설치하고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세성산의 동학농민군은 전봉준이 이끈 호남정예부대의 지원을 받아 북상하게 되면 서울이 큰 위협을 받게 되고, 동학농민군의 입장에서는 세성산이 함락되면 전체 동학군의 사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관건의 요지이기도 하였다.
공주로 진격하는 동학농민군은 효포로부터 웅치, 우금치의 3, 40리에 걸쳐 3면으로 공주성을 포위하고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초 9일이 밝아져 적세를 상세히 탐색한 즉 각 진이 바라다 보이는 곳은 잡기(雜旗)를 두루 꽂고 동쪽 판치 후록으로부터 서쪽 봉황산 후록에 이르기까지 30~40리에 걸쳐 열진(列陳)하고 산위에는 사람이 병풍과 같이 둘러 있어 그 세력이 심히 창궐하다.
아아 그들 비류(匪類)의 수만 군중이 40~50리에 걸쳐 연하에 길이 있은 즉 쟁탈하고, 높은 봉인 즉 점거하여 동에서 소리치면 서에서 따르고, 좌에서 번쩍 우에 번쩍 기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먼저 오르니 그들을 어떠한 의리와 어떠한 담력으로 타이르겠는가? 언념(言念) 정적(情跡)이 골이 떨리고 마음이 서늘하다.('선봉진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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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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