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누명 쓰고 즉결처형된 박찬길 검사, 78년 만에 희생자 인정

부친 박인서씨도 여순10·19사건 희생자로 공식 결정… 함께 희생된 방기환 서기는 미인정 상태

등록 2026.05.14 11:36수정 2026.05.14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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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위원회의 통지서 유족에게 전달된 여순사건위원회의 희생자와 유족 인정 통지서
▲여순사건위원회의 통지서 유족에게 전달된 여순사건위원회의 희생자와 유족 인정 통지서 유족 제공

1948년 당시 억울한 누명을 쓰고 토벌 경찰에 의해 즉결처형된 박찬길 검사와 그의 부친 박인서씨가 최근 여수·순천 10·19 사건 희생자로 공식 인정됐다.

여수·순천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는 박 검사와 그의 부친을 '희생자'로, 박 검사의 아들 및 손자들을 '유족'으로 결정해 통지했다. 사건 발생 78년 만이다. 박찬길 검사의 유족으로는 아들인 박경진 목사(78)와 그의 자녀 1남 2녀가 있다.

박찬길 검사(1910~1948)는 황해도 은율군 출신으로 숭실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뒤 일본 중앙대학 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해방 이후 실시된 첫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했으며, 1947년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 차석검사로 임관했다.

박찬길 검사 숭실전문학교 졸업 앨범 속 박찬길. 현재 그의 유일한 사진이다.
▲박찬길 검사 숭실전문학교 졸업 앨범 속 박찬길. 현재 그의 유일한 사진이다. 유족 제공

그러나 여순사건 직후인 1948년 10월 23일, 경찰 토벌대는 박 검사에게 '인민재판장' 혐의를 씌워 재판 없이 총살했다. 당시 법원 서기 방기환씨 등 20여 명의 민간인과 함께 순천농림학교(현 순천대학교 ) 인근에서 희생됐다.

이 사건은 유족들의 탄원으로 이듬해 광주지방검찰청이 수사에 나서며 세상에 알려졌다. 검찰은 박 검사가 인민재판장을 맡았다는 혐의가 '사실무근'이라고 결론 내렸다. 당시 수사에서는 일부 경찰이 과거 대한노총 계열 사건 수사 과정에서 박 검사에게 개인적 반감을 품고 있었으며, 여순사건의 혼란 속에서 그에게 좌익 혐의를 덧씌운 정황도 드러났다.

또 검찰 수사에서는 경찰 사찰계 인사들이 박 검사의 부친 박인서 씨까지 폭행해 숨지게 한 사실과 허위 자술서를 작성한 정황도 확인됐다. 당시 광주지검은 이를 두고 "하등 근거 없는 조치"라고 밝힌 바 있다.

박 검사의 아들 박경진 목사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억울하게 잃고도 당시에는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다"며 "이제라도 국가가 희생자로 인정해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니 다행"이라고 말했다.


한편 박찬길 검사와 함께 즉결처형된 법원 서기 방기환 씨의 희생은 아직 공식 인정되지 않은 상태다. 당시 검찰 수사가 박 검사 사건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방 서기 관련 기록은 상대적으로 적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유족이 희생자 신청 절차를 밟고 있으나, 관련 자료와 가족관계 입증 서류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겨자씨신문에도 실립니다.박찬길 검사 사건을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들을 위해 아래 기사를 링크해 주세요.
'박찬길 검사 총살 사건' 수사기록 72년 만에 발견(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78924)
#박찬길검사 #여순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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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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