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최초의 한중호조사가 결성된 선산학사 입구 우리 한인회는 해당 지역 정부 관계자에게 한중 호조사 관련 안내문을 설치하자고 수년째 제안하고 하고 있습니다.
이상훈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와 한국 독립운동의 깊은 인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곳에 정착하기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21년 3월 14일, 임시정부 외무부 소속 이우민과 이기창 등은 창사의 선산학사(船山學社)에서 후난성의 지식인 및 지도층인 구배기(具培基), 하민범(賀民範), 모택동(毛澤東) 등 중국 측 인사들과 뜻을 모았습니다. 이들은 한중 양국의 상호 이해와 우호 증진, 나아가 항일 연대를 목적으로 하는 최초의 '한중호조사'를 결성했습니다. 이는 초기 한중 연대 역사에 있어 매우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937년 창사로 이주한 임시정부 식구들은 장개석 총통과 후난성장 장치중(張治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상강(湘江) 주변 시 중심에 거주하며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습니다. 실제로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든든한 지원을 받던 당시의 편안했던 피난 생활을 가리켜 스스로를 "고등 난민"이라고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한국어 라디오 방송과 우편함이 개설되기도 하였으며, 당시 미국 예일대학교 중국 분교였던 아례학교(雅禮學校)는 임시정부의 주요 행사 장소이자 아이들의 교육 시설로 활용되었습니다. 이 아례학교는 예일대 중국 병원인 상아의원(湘雅醫院)의 의료 인력을 양성하던 곳으로 현재는 중남대학 의과대학으로 남아있습니다.
또한 임시정부의 아이들은 큰 언니 지복영(지청천 장군의 차녀로서 당시 18세, 광복군 최초의 여성 군인) 지사를 따라 종종 창사의 명소 악록산(嶽麓山)으로 소풍을 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38년 7월 4일, 창사 임시정부에서는 '제시(濟始·Jessie)'라는 아이가 태어납니다. 제시의 아버지 양우조 지사는 미국 MIT에서 수학한 인재로, 집안의 돌림자인 '제(濟)' 자를 이으면서 조국의 미래가 세계 속에서 당당히 제 몫을 하기를 바라며 영어식 이름을 지었습니다.
1938년, 남목청 사건과 김구 선생을 살려낸 상아의원

▲남목청 총격 사건으로 김구 선생이 입원 치료한 상아의원 남목청에서 총격을 입은 상아의원에서 미국인, 중국인 의사의 도움을 받아 완벽하게 치료했습니다.
이상훈
임시정부 식구들의 행복한 시간 중에도 시련은 있었습니다. 1938년 5월, 3당 합당을 논의하던 남목청 6호에서 밀정 이운환의 흉탄에 현익철 지사가 순국하고, 김구 선생을 비롯한 주요 요인들이 중상을 입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김구 선생은 흉부에 심각한 총상을 입고 상아의원(湘雅醫院)으로 후송되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1950년~1985년, 동아시아 평화의 상징, 영원한 대한국인 류자명(柳子明)
임정로드를 따라 걷는 창사 여정에서 우리가 반드시 마주해야 할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류자명 선생입니다. 류자명 선생은 수원농림학교(서울대 농대 전신)을 졸업하고 고향 충주에서 3.1운동을 준비하다 일제에 발각되어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의열단, 조선의용대 등을 거치며 항일 투쟁의 최전선에 섰습니다. 그는 해박한 지식과 포용력으로 이념을 초월하여 김구(우파 민족주의자), 김원봉(좌파 민족주의자), 신채호(민족사학자 겸 아나키스트)는 물론 주은래(공산당), 장개석(국민당) 등과 교류한 동아시아 평화의 상징적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치열한 삶은 중국 대문호 바진(巴金)이 집필한 여러 소설의 주인공 모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광복 후에 다시 농업학자로 돌아가 대만의 농림처에서 근무하며 환국을 준비하였으나 정치적 상황(한국전쟁 발발 등)으로 인해 끝내 고향 충주에 못가고 1950년부터 1985년까지 후난농업대학(湖南農業大學) 교수로 재직하며 농학 발전에 평생을 헌신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까지 중국 국적을 받지 않고 조선인, 대한국인으로 남았던 그는 남북한과 중국 모두에서 상훈을 수여받은 유일한 독립운동가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류자명 선생의 아들인 류전휘 후난대 퇴직 교수는 현재 창사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로함에도 불구하고 가끔 현지 한인회 행사에 참석해서 현지 한인 교민들에게 "후난과 창사는 한국과 인연이 깊다"며 "한중 우의를 계속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일들이 이루어졌으면 한다"는 애정 어린 당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후난 창사 한인회는 임정 이야기의 보물창고에 사는 창고지기

▲대만 농림처 근무 당시 가족들과 함께 사진을 촬영한 류자명 선생 좌측 백발의 중년이 류자명 선생이고 앞열 우측 첫번째 소년이 류자명 선생의 아들 류전휘 교수입니다.
홍소연
후난 창사는 우리 임시정부와 관련하여 숨겨진 이야기가 가득한 보물창고 같은 곳입니다. 우리 한인회는 이곳에서 그 보물을 조사하고 연구하고 정신을 잇고 있습니다. 매년 한인회 행사를 남목청 임시정부 기념관에서 시작하며 종종 한인2세들을 데리고 현장을 답사하며 의미를 되새기고 있습니다.
우한에서 시작되어 창사에서 짙게 맺힌 임정로드는 이제 단순한 과거의 기록을 넘어, 류전휘 교수의 당부처럼 현재 재중 한인 사회가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살아있는 유산입니다.
이제 우리는 화중 임정로드의 종착지 '한인회'라는 단어가 중국에서 최초로 시작된 난창으로 갈 시간입니다. 난창을 안내할 장시 난창 한인회 박광보 회장은 '장시성 거주 1호 대한민국 교민'입니다. 또한 오랫동안 한국 문화와 한국어를 전도한 대학 교수입니다. 그럼 다음 편 난창에서는 임시정부와 관련하여 어떤 이야기가 있을지 '현지 한인회장'의 눈으로 샅샅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임시정부의 행사가 열렸던 상아의원 대강당을 방문하여 병원 소개 영상을 보는 후난 한인들 우리 한인회는 매년 한인 2세들과 임시정부 참관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이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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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후난에 거주하면서 한국과 관련된 역사 문화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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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짧은 평화와 동아시아 평화의 상징 '류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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