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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 돌아가신 뒤 10년 만에 연 항아리, 그 속에 담긴 것

보이차를 좋아하시던 시어머니와의 추억... 그리운 향기를 떠올려봅니다

등록 2026.05.18 13:40수정 2026.05.18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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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낮에는 여름처럼 기온이 오르더니 새벽에는 찬 기운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우리 동네는 다른 지역보다 기온이 1, 2도 정도 낮은 편이다. 새벽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고 나니 한기가 느껴졌다. 번데기처럼 이불을 돌돌 말고 누워있다가 보니 따뜻한 것이 생각났다.

'오래간만에 보이차나 마셔볼까?'


주방으로 가 먼저 전기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가 적막한 새벽 거실을 채운다. 찬장을 열어 손때 묻은 개완(차를 넣고 우려내는 주전자)을 꺼내고, 보물 단지처럼 아껴둔 커다란 보이차 항아리 뚜껑을 열었다.

훅 끼쳐 오는 묵직하고 따스한 흙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찻잎을 넣고 끓는 물을 부었다가 이내 첫 물을 싹 비워냈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찻잎을 깨우는 '세차'의 시간이 필요하다. 다시 물을 붓고 가만히 기다렸다. 동이 터오는지 불그스름한 빛이 밀려드는 거실 가득 향이 퍼져 나갔다. 찻잔을 감싸 쥔 손바닥에서부터 서서히 온기가 퍼지며 메말랐던 목과 마음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친구 따라 시작한 차 공부

보이차 보이차 마시는 아침
▲보이차 보이차 마시는 아침 황윤옥

은은한 차향이 번지자 내 시간은 어김없이 이십 년도 더 지난 옛날, 사십 대 초반의 어느 봄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차 공부를 하던 친구를 따라 무작정 팔공산 동화사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는 처음 보이차를 만났다. 불교를 믿는 건 아니지만 절에 가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동화사에 계신 지운 스님께 다도를 배우고 마음 챙김과 명상을 배웠다.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나는 친구 따라 동화사에 간 것이다.

중국 운남성의 대표적인 발효차라는 보이차는 독특한 향미와 건강에 좋은 효능이 있다고 했다. 그 매력에 이끌려 나도 차를 조금씩 사 모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생차니 숙차니 하는 설명을 들어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만드는 방식과 발효 과정에 따라 맛과 성질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몸으로 배운 건 한참 뒤의 일이다.


찻잎을 수년에서 수십 년간 천천히 자연 발효 시킨다는 생차를 처음 마실 때는 녹차처럼 풋풋하고 떫은 맛이 강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맛이 부드러워지고 깊은 향이 났는데, 나는 혀 끝에서 감도는 그 싱그러운 수박 향이 그렇게 좋았다. 처음엔 자사호(흙으로 만든 작은 주전자)를 사용했다. 오래 쓰다 보니 망가져서 지금은 개완을 사용한다.

수년간 사 모은 보이차가 보물처럼 큰 항아리에 가득 담겨 있을 즈음이었다. 어머님께서 갑자기 암 진단을 받으셨다. 부산에 사시는 어머님은 맏이(남편)가 있는 대구에서 치료 받기를 원하셨다. 수술과 입원을 반복하셨고, 몸이 회복되시면 다시 부산에 내려가시곤 했다.


우리 집에 계실 때 보이차를 끓여 내드렸는데 어머님께서 아주 만족해하셨다. 집에서도 하루에 두세 잔 드시라고 내려가실 때 보이차를 드렸다. 어머님께서는 동네 어르신들과 보이차를 자주 끓여 드신다며 전화하실 때마다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 제가 다른 건 몰라도 보이차는 평생 드릴 수 있어요. 아끼지 마시고 친구 분들과 따뜻하게 나눠 드세요."
"아이고, 그렇나. 니 덕분에 이키나(이렇게) 좋은 차를 다 마시네. 고맙데이."

어머님은 대구 우리 집에 머무시는 동안, 병원 치료로 입맛을 잃을 때마다 내가 우려내 온 보이차를 마치 숭늉처럼 편안하게 들이키셨다. 항암 치료로 지친 어머님의 주름진 손이 따뜻한 찻잔을 감싸 쥐고 있을 때면, 비로소 어머님의 얼굴에도 평온이 찾아오곤 했다.

"야야, 사실은 항암 주사 맞는 것이 참말로 무서븐기라."

아들들에게는 강한 어머니가 되고 싶으셨지만 찻상 앞에서 맏며느리인 내게는 속내를 털어놓으시기도 했다. 차는 우리 고부 사이의 말 없는 위로이자 단단한 연결고리였다. 어디서 들으셨는지 이런 말씀도 하셨다.

"야야, 이기 항암에도 좋다 카더라."
"어머니, 맞는 말인지는 몰라도 아무리 몸에 좋은 음식이라도 많이 드시면 안 좋아요. 꼭 식사 후에 드세요."

암 수술을 받으신 어머님은 예전보다 더 건강 관리에 신경 쓰셨다. 아들만 삼 형제를 두신 어머님은 맏며느리인 나를 딸처럼 살갑게 대하셨다. 친정엄마와 산 세월보다 어머님과 보낸 시간이 많아 나도 어머님이 편하고 정겨웠다.

어머님은 완치 판정을 받으신 지 2년 후 갑작스레 암이 재발 하셨다. 병원에서조차 손도 쓸 수 없는 기가 막힌 상황에 온 가족이 망연자실했다. 직장에 있던 나는 긴급 호출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패혈증이 왔으니 당장 인공호흡기를 달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아득한 슬픔 속에서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서류에 서명을 하면서도,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10년 만에 어머님의 향기를 맡으며

보이차 10년 만에 열어보는 보이차 항아리 뚜껑
▲보이차 10년 만에 열어보는 보이차 항아리 뚜껑 황윤옥

중환자실에서의 면회는 고통의 연장이었다. 인공호흡기를 달면 환자가 힘들어하기 때문에 계속 수면제를 투여해 잠을 재운다고 했다. 가족들이 건네는 마지막 인사를 어머니는 잠든 상태로 들어야 했다. 때로는 일상을 조잘 거리는 내 목소리에 반응하듯 눈물을 흘리시기도 했다. 의식은 잠들었어도 귀는 열려 있어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수십 개의 주삿바늘을 온몸에 꽂은 채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내던 어느 날이었다. 의사는 이제 가망이 없으니 환자를 위해 약을 떼어내야 한다고 했다. 순간 필라멘트가 끊긴 전구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중환자실에서 약줄에 의지한 채 계속 잠만 주무셔야 했던 어머님께 난 따뜻한 보이차 한 모금도 입술에 축여 드리지 못했다.

어머님이 가시는 길에 아주 많은 후회의 눈물을 묻어두었다. 그때 인공호흡기를 달지 않았다면, 어머니가 기계에 의존해 잠들어 있는 대신 가족들과 눈을 맞추며 마지막 인사를 나눌 시간이 있지 않았을까. 수십 개의 약줄을 달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게 한 것은 아닌지, 편히 눈을 감지 못하게 방해한 것은 아닌지, 그 죄책감이 몇 년 동안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지난 2016년, 어머님이 떠나시고 10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집에 있던 보이차 항아리 뚜껑을 열지 못했다. 그것은 단순한 차 항아리가 아니라 어머님을 지켜드리지 못했다는 회한과 그리움이 봉인된 아픈 기억의 단지였기 때문이다. 오래간만에 보이차를 마시니 지금은 내 곁에 계시지 않은 어머님이 생각난다.

더운 여름이면 메밀국수를 즐기시던 분, 찹찹한 날씨면 보이차로 몸을 데우시던 어머님. 일흔둘의 이른 연세에 가셔야만 했지만 끝내 보내드리기 싫었던 내 그리운 어머님. 오늘 아침, 십 년 만에 비로소 조심스레 열어 젖힌 항아리 안에서 어머님의 향기를 맡는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어머님 #보이차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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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가 좋아서 세종사이버대 문예 창작학과에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다해 정성껏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현재 브런치 작가입니다. 사는 이야기를 주로 씁니다. 가끔 음식 이야기도 씁니다. 삼강 문학상 수필 부문 신인상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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