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장군 전봉준 마지막 모습 녹두장군 전봉준의 유일한 사진으로 알려진 재판소행 사진이다. 1895년 2월27일 한성 일본영사관으로 압송된 전봉준이 재판소로 이송되기 직전의 모습이다. 이 사진은일본인 사진사 무라카미 덴신이 촬영한 것으로(국가기록원제공)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동학혁명기념관
우리 역사에는 시대마다 걸출한 개혁주도의 인물이 있었다. 이들 중 몇 번 만이라도 성공하였다면 우리 역사의 전개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이들은 그때마다 국정개혁과 만인평등을 주장하고 대외적인 민족자주와 혁신정책을 내세웠다.
그러나 개혁주도 인물들은 대부분이 보수 기득세력의 두꺼운 장벽을 넘지 못하거나 외세의 개입으로 그 시도가 좌절되고 말았다. 우리 국민성은 전통적으로 보수와 개혁의 두 흐름으로 교직되었다. 기마민족과 농경민족의 혈통을 갖고 있는 한민족은 원시 고대사회의 기마민족적 진보성이 토착농경 사회로 정착되면서부터 보수성이 강한 민족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로 인해 현실안주의 보수성향이 국민 일반의 의식과 행동을 규제하게 되고, 압제와 수탈, 외세의 침략에 과감히 항거하다가도 금방 주저앉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전통사회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에서 대표적인 개혁주도 인물에는 신라 말기의 장보고, 고려 중기의 묘청과 만적, 말기의 신돈, 조선 초기의 정도전, 중기의 조광조, 말기의 홍경래, 최제우, 전봉준 그리고 대한제국 시대의 김옥균과 서재필을 들 수 있다.
이들 11명의 '개혁인물'에는 견해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개중에는 순수한 개혁주의자라기보다는 반역자, 종교적인 이상주의자, 외세지향자로 불릴 수 있는 인물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중에는 왕권의 보호 속에서, 즉 체제 내에서 개혁을 시도한 사람도 있고, 왕권을 뒤엎고 개혁하고자 한 혁명론자도 포함된다. 그리고 외세를 끌어들여서 국정의 개혁을 도모하고자 한 사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이들이 시도했던 목표가 국정의 개혁에 있었던 만큼 '개혁인물'로 선정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 민족성은 보수적인 측면이 강해서 개혁을 꺼리고 두려워한다. 따라서 11명의 개혁인물은 대부분 실패하기에 이르렀으며 서재필을 제외한 10명은 살해되었다. 서재필의 경우, 자신은 해외망명과 미국 국적을 가져서 겨우 생명을 부지했지만 대신 가족이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
서재필 외에 10명의 개혁인물은 약속이나 한 듯이 처참하게 죽어갔다. 장보고는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에게 살해됐으며, 묘청은 김부식의 토벌과정에서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만적은 관군에 체포돼 강물에 던져졌고, 신돈은 왕명으로 참형을 당했다. 정도전은 이방원의 테러로 살해되고, 조광조는 훈구파의 반격으로 능주 귀양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홍경래는 싸움터에서 전사했고, 최제우는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됐으며, 전봉준은 효수당했다. 김옥균은 이역에서 자객 홍종우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들 뿐만 아니다. 조선명종 시대 황해도 일대에서 신출귀몰하던 의적 임꺽정은 참모 서림(徐林)의 밀고로 체포되어 처형되고,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듣던 평민출신 의병장 신돌석은 김상렬(金相烈) 형제의 계략에 빠져 암살되었다. 믿고 따르던 부하의 밀고나 변신한 동지의 손으로 붙잡힌 독립운동가도 적지 않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실패한 혁명가의 말로는 비참하다. 동학군의 거사는 처음부터 승산이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관군을 상대하기도 벅찬 싸움이었는데, 일본군이 개입하면서 승패는 이미 결정되고 있었다. 일본군의 개입 소식은 동학농민군에게 심리적으로도 불안감을 갖게 하였다.
무엇보다 그들이 소지한 화력이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일본군이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정부 측은 사실상 무장해제를 당하여 이후 조선관군은 일본군의 지휘감독을 받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농민군의 참여는 줄어들고, 충청지역에서 벌어진 몇 차례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 사기에 크게 작용하였다. 전봉준의 지원요청에도 남원에 포진하고 있던 김개남 장군 휘하의 부대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지방의 신뢰받는 유생과 재산가 계층이 동학농민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계급적으로 기득세력이었다. 오히려 동학의 개벽(개혁) 사상과 전봉준의 평등사상에 거부감을 가졌다. 동학농민혁명이 좌절된 요인의 하나이기도 하다. 동학농민군 지휘부의 엄격한 지시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방에서는 이들의 행패와 비리가 잇따랐다. 부잣집을 털거나 붙잡아다가 곤장질을 하고 재물을 약취하였다. 모든 혁명에는 부작용이 따르고 '부산물'이 혁명의 본질을 훼손하기 일쑤이듯이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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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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