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탑 앞에 선 일하는예수회 회원들 국립 5.18민주묘역 추모탑 앞에 선 일하는예수회 회원들. 동료의 부축을 받은 채 엉거주춤 선 이가 김규복 목사이다(왼쪽 두 번째) /
손은정 목사 제공
이어 회원들은 국립5·18민주묘지로 이동해 동료 목회자인 고 오규만 목사의 묘를 참배했다. 오 목사는 경기공업전문학교 재학 시절 5·18 항쟁에 참여했다가 제적됐으며, 이후 5·18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신학을 공부한 뒤 민중교회 훈련을 받아 목회 활동에 나섰지만 암 투병 끝에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향년 55세). 유미란 목사는 "오 목사는 늘 병약했지만 누구보다 밝았고,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격려하며 희망을 주던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회원들이 마지막으로 찾은 이는 '청주 지역 민중운동의 대부'로 불렸던 호죽 정진동 목사였다. 정 목사는 1980년 4월 공주교대 강연에서 "사회적 특혜를 받은 대학생들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가 합동수사본부에 강제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수사당국은 그를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과 연결하려 했지만 별다른 혐의를 찾지 못했고, 이후 그는 5·18 관련자로 인정돼 민주 묘역에 안장됐다.
끝나지 않은 5월을 살아가는 사람들
이날 참배에 참석한 김규복 목사(대전 빈들교회 원로)의 걸음은 유난히 느렸고, 동료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가끔 쉬어야 했다. 김 목사는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일대에서 약 10만 명의 학생이 "계엄 철폐", "신군부 퇴진"을 외쳤던 이른바 '서울역 회군' 시위의 주동자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이후 수배자가 돼 도피 생활을 하다 전남 순천에서 체포됐고, 이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1970년대 유신 반대 투쟁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은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 이날도 걷기가 몹시 불편한 상태였지만 동료들과 함께 묘역 참배 행진에 끝까지 함께 하였다.
"집행유예 기간이었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광주에 대한 죄책감이 컸습니다."
김 목사는 수배 생활 당시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던 선배를 통해 비교적 이른 시기에 광주의 참상을 전해 들었지만, 석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광주를 찾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5.18민주묘역을 찾은 사람들 걸음 위에는 갖가지 서로 다른 오월이 아로새겨 있었다. 누군가는 5.18에서 삶의 시계가 멈춘 상태로 상한 몸으로 살아가는 중이고, 누군가는 평생 시대의 부채를 짊어진 상태로, 또 누군가는 앞서간 이들이 남긴 시대적 과업의 책임감으로 살고 있었다. 적어도 이들에게 5·18은 아직 끝나지 않은 현재 진행형이 분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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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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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묘역 참배한 목회자들 "우리에게 5·18은 현재진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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