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6.05.20 13:18수정 2026.05.20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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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과 선후배 세 명이 템플스테이로 전국 사찰을 유람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특별한 종교적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그저 사색과 '힐링'이 있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고즈넉한 순간이 좋아서입니다. 지난 16일부터 17일까지 1박 2일간 발길이 닿은 곳은 밀양 재약산 자락의 표충사였습니다.
신록 속에서 마주한 백성을 향한 마음, 위양지

▲위양지 노랑 창포와 왕버들 위양지 노랑 창포와 왕버들
직접 촬영
조금 일찍 서둘러 대구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 남짓, '백성을 위하는 연못'이라는 뜻을 가진 밀양 부북면의 위양지(위양못)에 도착했습니다. 신라 시대에 농업 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축조된 이 저수지는 이름부터 백성을 긍휼히 여겼던 조상들의 '위민(爲民) 사상'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평일임에도 주차장은 이미 관광버스와 승용차로 가득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찾는 명소 답게 주차비와 입장료는 모두 무료입니다.
둘레길 초입에는 과일과 화분을 파는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봄의 활기를 더하고 있었습니다. 저수지 쪽으로 우아하게 가지를 뻗은 왕버들 아래 벤치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집에서 준비해 간 과일과 구운 계란을 따뜻한 차와 곁들이니, 저수지를 타고 불어오는 바람이 온몸을 시원하게 감싸 안았습니다.

▲ 위양지 노랑 창포와 왕버들
직접 촬영
만개했을 때 눈이 부시다는 이팝나무 꽃은 이미 지고 없었지만, 그 자리를 채운 신록이 싱그러웠습니다. 비록 연두색 물풀이 가득해 거울 같은 반영은 보지 못했어도, 물가를 향해 길게 늘어진 왕버들 가지와 노란 창포꽃이 자아내는 운치 덕에 눈이 호사를 누렸습니다. 30분이면 걸을 400미터 남짓한 둘레길을 우리는 한 시간 동안 걸었습니다.
그만큼 '저수지 멍'에 깊이 빠졌던 탓이겠지요. 참고로 이곳은 반려동물 동반이 가능해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기에도 좋습니다. 노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니, 이른 아침의 물안개나 해 질 무렵의 석양 시간을 맞춰 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치형 돌다리를 건너 만나는 완재정은 위양지 최고의 포토존입니다. 쪽문 사이로 내다 보이는 저수지 풍경은 마치 한 폭의 액자 같아 줄을 서서 기다릴 만한 가치가 충분합니다.

▲위양지 완재정 위양지 완재정
직접촬영

▲위양지 완재정 능수버들 돌다리 위양지 완재정 능수버들 돌다리
직접촬영

▲위양지 완재정 가는 길 위양지 완재정 가는 길
직접촬영
표충사에서 만난 사명대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템플스테이 입소 시간이 촉박해졌습니다. 서둘러 단장면 재약산 자락에 위치한 표충사로 향했습니다. 대학 시절 친구와 사자평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보낸 이후, 오랜만에 다시 찾은 고찰입니다.
우리가 가장 늦게 도착한 탓에 서둘러 수련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미안한 마음도 잠시, 연신 다정하고 따뜻하게 우리를 맞아주시는 팀장님의 안내에 마음이 이내 스르르 녹아내렸습니다. '다정함은 결국 모든 것을 이긴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습니다.

▲표충사 우화루 표충사 우화루
직접 촬영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나라를 구한 사명대사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 명명한 사찰입니다. 석축 위 계단을 오르니 황면선사가 인도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 와서 사리를 봉안하고 세웠다는 삼층석탑이 우리를 반깁니다. 고찰의 아늑함 덕분인지 방문객도 많았습니다. 특히 꽃비가 내린다는 '우화루'에는 많은 이들이 마루에 앉아 바람의 소리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표충사 삼층석탑 일몰 표충사 삼층석탑 일몰
홍영미
재약산(載藥山)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흥미롭습니다. 신라 흥덕왕의 왕자가 병을 얻었을 때 이곳의 영정약수를 마시고 고질병이 나아 '약이 실린 산', 재약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지요. 비로자나불을 모신 장엄한 대광전, 중생을 보살피는 천수천안관음보살이 계신 관음전, 시왕을 모시고 있다고 하여 시왕전 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모신다는 뜻에서 지장전이라고도 불리는 명부전을 돌아보며 표충사를 알아갔습니다.

▲표충사 명부전 표충사 명부전
직접 촬영
특히 눈길을 끈 곳은 사찰 입구 쪽 한 편에 자리한 '표충서원'이었습니다. 불교 사찰 안에 유교 문화인 서원과 사당이 공존하는 이 이색적인 풍경은 조선 후기 불교와 유교의 독특한 관계를 보여줍니다. 서산, 사명, 기허 세 대사의 영정을 봉안한 이 서원이 절 내에 들어서면서, 원래 '영정사'였던 절 이름도 '표충사(表忠寺)'로 바뀌게 되었다고 합니다.

▲표충사 내 표충사 표충사 내 표충사
직접촬영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승병을 일으키고, 전쟁 후에는 홀로 일본으로 건너가 3500여 명의 조선인 포로를 송환해 낸 영웅 사명대사. 그와 관련한 소장 유물을 보존하는 표충사 호국박물관은 흔히 불교 문화재 박물관을 호칭하는 '성보박물관'이 아닌 '호국박물관'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하니 대사가 전설 속 인물이 아니라 실존했던 위인임이 피부로 느껴집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나라를 위하는 일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휴식형 템플스테이의 묘미는 맛있는 절 밥과 자유로운 사색에 있습니다. 표충사의 저녁 공양은 소박하면서도 깊은 맛이 있었습니다. 배불리 먹고 저녁 예불에 참석했습니다. 절하는 법과 예불 의식 등을 템플스테이 팀장이 미리 친절하게 설명해 준 덕분에 온전히 스님의 목소리와 범종 소리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표충사 우화루의 밤 표충사 우화루의 밤
홍영미
예불이 끝난 후, 어스름해진 계곡 숲길을 산책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설명을 들으며 걷는 우거진 숲길은 낮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산책을 마치고 다시 찾은 우화루. 낮의 북적임은 간데 없고, 오직 우리 세 사람만이 그 넓은 마루를 독차지했습니다. 까만 밤하늘에 별들이 다닥다닥 빛나고 있었습니다. 밤 10시, 산사의 묵언 시간이 시작되면서 별빛과 함께 우리의 밤도 깊어갔습니다.
다음 날 아침, 새들의 지저귐 속에 눈을 떠 아침 공양을 마치고 사찰 뒷길을 걸었습니다. 고요에 잠긴 청하암을 거쳐 대광전에서 초하루 사시 예불까지 마친 후, 사명대사의 높은 뜻을 가슴에 품은 채 산사를 내려왔습니다.
온전한 평온을 주는, 명례성지의 하이라이트
대구로 돌아오는 길에는 하남읍 낙동강 변에 위치한 밀양 명례성당(명례성지)에 들렀습니다. 이곳은 병인박해(1866년) 때 순교한 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생가터 주변에 세워진, 경남 지역 초기 천주교의 영적 고향이자 소중한 역사적 장소입니다.

▲명례성당 야외십자가의 길 명례성당 야외십자가의 길
홍영미
양반 신분이었던 신석복은 천주교에 입교한 후 문중에서 쫓겨나 누룩과 소금 장수를 했습니다. 굳이 험한 소금 장수의 길을 택한 것은 낙동강 나루를 건너 다니며 의심 받지 않고 교우들을 돕고 신앙을 전파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대구 감영으로 압송된 그는 "나를 위해 포졸들에게 단 한 푼도 주지 말라"며 모진 고문 앞에서도 끝까지 배교 하지 않았고,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에 순교했습니다.

▲밀양명례성당 밀양명례성당
홍영미

▲명례성당 명례성당
홍영미
성지에 들어선 한옥 성당은 영남 지역에 천주교의 씨앗을 뿌리려 했던 이들의 애달픈 역사를 품고 있었습니다. 1938년에 축소 복원된 한옥 성당 내부는 남녀 석이 칸막이로 구분되어 있던 초기 한국 천주교의 소박한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주거 양식과 융합한 모습이 무척 경건하고 아늑합니다.

▲명례성당 명례성당
홍영미
그리고 이어진 명례성지의 하이라이트, 신석복 마르코 기념성당. 언덕 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성당 건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알고 보니 언덕의 경사면을 그대로 살려 건물 전체를 땅속으로 살포시 숨겨 놓은 독특한 구조였습니다.
미로 같은 콘크리트 계단을 따라 지하 같은 1층으로 내려가니, 높은 천장 위로 은은한 채광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순교자의 소금을 상징하는 12개의 자연 빛 차광창 덕에 전등을 켜지 않아도 내부가 환했습니다. 온전한 평온을 주는 공간입니다.

▲명례성당 순교탑 명례성당 순교탑
홍영미
유해 경당 옆 고해소를 빼꼼 열어보았습니다. 살아가며 나도 모르게 지었을 수많은 죄와 과오들... 종교는 다르지만 저기 앉아 조곤조곤 내 삶을 털어놓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습니다. 성당 건물에서 군위의 '사유원' 같은 깊은 울림이 느껴진다 했더니, 역시 '빈자의 건축'으로 유명한 건축가 승효상의 작품이었습니다. 건축주였던 신부는 "소금처럼 녹아내린 순교자의 삶처럼, 건축물도 언덕 속으로 녹아 사라진 느낌이었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명례성당 명례성당
홍영미

▲명례성당 자율카페 낙동강 뷰 명례성당 자율카페 낙동강 뷰
홍영미
열린 공간이 주는 넉넉한 위로를 찾아서
언덕을 내려오니 양심껏 찻값을 통에 넣는 자율식 셀프 카페가 반겨줍니다. 소박한 배려가 묻어 나는 카페 마당을 나와 낙동강 변 자전거 길을 바라보았습니다. 무심한 듯 끝없이 펼쳐진 노란 금계국 무리가 마치 황금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경계를 두지 않고 온전히 문을 열어주는 공간이 주는 넉넉함과 위로는 이번 여행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습니다. 백성을 위해 연못을 판 위민(爲民) 사상, 나라가 위태로울 때 떨치고 일어난 사명대사의 뜨거운 충혼, 그리고 스스로를 녹여 세상을 밝힌 순교자의 신념까지. 밀양의 푸른 신록 속에 그들의 이야기가 촘촘히 박혀 있었습니다. 이번 여정을 통해 우리는 다시 일상을 지탱할 위안과 삶의 이정표를 얻고 돌아왔습니다.
[여행 정보]
*밀양 위양지 : 경남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296 (입장료 및 주차료 무료 / 반려동물 동반 가능)
*표충사 템플스테이 : 경남 밀양시 단장면 표충로 1338 (휴식형 및 체험형 프로그램 운영, 사전 예약 필수)
*명례성지 : 경남 밀양시 하남읍 명례안길 42-3 (한옥성당 및 승효상 건축가의 기념성당 관람 가능, 매주 월요일 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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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비 내린다는 표충사 '우화루'에서 마주한 별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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