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생성 이미지
오마이뉴스
최근 한 식당에서 장애인 손님의 식사비를 대신 계산하려던 비장애인 손님과, 이를 단호하게 거부한 식당 주인의 일화가 화제가 되었다. 점주는 "그분들도 돈이 있고, 똑같이 소비하러 오신 손님인데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 같아 거절했다"고 이유를 밝혔다. 이 뉴스를 접하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까맣게 잊고 지냈던 13년 전의 어느 날 저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13년 전, 나는 지금의 남편과 동갑내기 연인으로 한창 예쁘게 연애 중이었다. 휠체어를 탄 나와 비장애인인 남자친구의 데이트는 늘 주변의 시선을 끌었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고 여느 20대 커플처럼 풋풋한 사랑을 키워가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더 예쁘고 멋지게 보이고 싶어 수줍은 미소를 나누던, 설레는 저녁 식사였다.
식사를 기분 좋게 마치고 계산대로 향했을 때, 점원이 뜻밖의 말을 건넸다.
"저기 안쪽 테이블에 계시던 분이 두 분 식사비를 이미 계산하고 가셨어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나와 남자친구는 동시에 얼어붙었다.
"네? 저희 아는 분이 와 계셨나요?" 남자친구가 황급히 가게 안을 둘러보았지만, 이미 낯선 손님들뿐이었다. 점원은 그저 인심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아니요, 아는 분은 아니고 두 분 모습이 너무 보기 좋고 예쁘다고, 맛있게 드시라고 대신 내주고 가셨어요. 좋은 뜻으로 하신 거니까 기분 좋게 가시면 돼요."
점원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내 얼굴은 순식간에 화끈거리며 굳어버렸다. 밀려오는 당혹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내가 너를 불쌍한 사람으로 만든 것 같아서..."
식당 문을 열고 나오는 길, 밤공기가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가득했던 데이트의 설렘은 간데없고, 우리 사이에는 무겁고 서먹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씁쓸함과 비참함이 엉겨 붙었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내가 가장 잘 보이고 싶고, 나를 온전한 한 사람으로 사랑해 주는 남자친구까지 이 '동정의 굴레'에 함께 묶여버렸다는 사실이었다. 휠체어를 탄 여자친구를 둔 탓에, 그 역시 누군가의 눈에는 '대견하고 기특하게 봐줘야 할 대상'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가로등 밑을 천천히 걷던 중, 남자친구가 먼저 조심스럽게 침묵을 깨고 내 손을 꼭 잡았다.
"많이 당황스럽지? 기분 상하지 마. 그분은 그냥 좋은 마음으로 하신 걸 거야."
"알아... 나쁜 뜻 아닌 거 아는데, 마음이 왜 이렇게 복잡하지? 나는..."
"나도 사실 좀 당황했어. 우리는 다른 커플들처럼 평범하게 데이트하러 온 건데... 누군가에게는 우리가 '도와주고 싶은 불쌍한 커플'로 보였다는 거잖아. 내가 너를 그렇게 보이게 만든 것 같아서 미안해."
"아니야, 네가 왜 미안해. 내가 휠체어를 타서... 나 때문에 너까지 그런 대접을 받게 한 것 같아서 내가 더 미안해."
그날 밤 우리는 선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시혜'의 대상이 된 서로를 위로하며 긴 대화를 나누었다. 순수한 호의였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의 마음속에는 분명 타인을 향한 따뜻한 온정이 가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온정이 우리에게 닿았을 때, 그것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연인의 자존감에 커다란 생채기를 내고 말았다. 우리는 온전한 '소비자'이자 '독립된 성인'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기특하게 바라봐야 할 대상'으로 타자화되었기 때문이다.
과잉된 선의보다 필요한 것은 '평범한 이웃'으로 바라보는 눈
최근 뉴스 속 점주의 대처에 수많은 이들이 박수를 보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점주는 장애인 손님을 '불쌍한 약자'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똑같이 식사를 즐기러 온 '존엄한 손님'으로 대우했다. 타인의 과잉된 선의가 평범한 손님의 주체성과 자존감을 훼손하지 않도록 가로막아 준 것이다. 진정한 배려란 무엇인지를 정확히 꿰뚫어 본 통찰이었다.
우리가 흔히 범하는 오류 중 하나는, 약자를 돕는 모든 행위가 언제나 옳고 아름다울 것이라는 착각이다. 하지만 상대방의 동의 없는 선의, 상대방의 자립심을 고려하지 않은 호의는 때로 상대에게 보이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휠체어를 탄 사람을 향해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거나, 묻지마식으로 식사비를 대신 내주는 극적인 호의가 아니다. 그저 식당에 들어왔을 때 자연스럽게 자리를 안내하고, 메뉴판을 건네고, 식사를 마친 후 정당한 대가를 계산하는 '평범하고 당연한 일상'이다. 특별한 대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특별하지 않게, 남들과 똑같이 평범한 이웃으로 바라봐주는 눈이 필요할 뿐이다.
존중의 시작, '알맞은 거리 두기'
13년 전 그 곱창집을 나오며 느꼈던 복잡한 감정은 오랜 시간 동안 내가 사회를 바라보고, 또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누군가를 도울 때는 반드시 상대방의 존엄성이 훼손되지 않는지, 나의 선의가 상대방을 위축시키지는 않는지 끊임없이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연대와 온정은 차가운 세상을 버티게 하는 소중한 가치다. 하지만 그 연대가 빛을 발하려면 반드시 '존중'이라는 바탕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존중은 상대방과 나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는 것에서 시작된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이 아니라,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를 바라볼 때 비로소 건강한 관계가 맺어진다.
이제는 타인을 향한 호의에도 '알맞은 거리'가 필요함을 우리 사회가 인지해야 할 때다. 13년 전 우리의 식사비를 결제했던 그 손님에게도, 최근 뉴스 속에서 따뜻한 마음을 내려 했던 그 손님에게도 악의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다음번에는 그 따뜻한 마음을 '대리 결제' 대신, 그저 조용히 목인사를 건네거나 평범한 이웃으로 공간을 공유하는 것으로 표현해 주기를 바라본다.
과도한 동정보다는 평범한 일상을 보장하는 무심함이, 때로는 가장 품격 있는 존중이 될 수 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1
아이들의 손길에서 편견 없는 일상을 배우는 특수교사입니다. 휠체어 바퀴를 굴리며 만나는 보도블록의 요철만큼이나 선명한 삶의 이야기들을 강연과 글로 나누고 있습니다.
공유하기
데이트 하는데 식사비 대신 내준 손님... 왜 상처가 됐을까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