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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잠들던 천재... 목숨 걸고 쓴 곡

[박형숙 소설가의 촉] 체제의 폭압에서 내면의 저항 담아낸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

등록 2026.05.26 10:23수정 2026.05.26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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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의 한 장면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의 한 장면 눈 엔터테인먼트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는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영화다. 노을 지는 석양에서의 왈츠 장면은 여전히 명장면. 태희(이은주)는 인우(이병헌)에게 이렇게 묻는다. "혹시 왈츠 출 줄 알아요? 저 요즘 교양 시간에 배우거든요." 그리고 인우의 손을 잡고 춤을 추면 흐르는 음악. 쇼스타코비치의 <두 번째 왈츠>

당신이 좀 더 영화광이라면 스탠리 큐브릭 감독, 톰 크루즈, 니콜 키드먼 주연의 <아이즈 와이드 셧>을 봤을 것이다. 이 커플이 파티에 가기 전 준비 장면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이 음악을 기억하는지? 왈츠인데도 경쾌함과는 뭔가 다른 느낌이 뒤 목덜미를 타고 오른다. 이 묘한 느낌의 정체는 무엇일까?


<두 번째 왈츠>는 러시아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소비에트 연방 시절 썼던 곡으로 정확한 이름은 <재즈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 2번> 중 왈츠 2이다. 이 곡을 들으면 왈츠의 스텝과 함께 현재의 안온한 일상이 사라질 것 같은 불안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두 영화 속에서는 연인의 이별, 부부 생활의 위기 등으로 나타나지만, 스탈린 체제 아래에서 그것은 쇼스타코비치의 목숨이 걸려 있는 불안이었다.

우리에게도 그와 비슷한 불안이 퍼져 있던 시대가 있었다. 송창식의 노래 <왜 불러>가 건방지다고 금지곡이 되던 시대, 정부에 대한 비판은 모두 체제전복으로 처벌받던 시대, 북한이라는 단어만 내뱉어도 빨갱이로 몰고 가던 시대. 그의 음악 속 불안은 우리가 경험한 불안과 많이 닮았다.

쇼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이 수록된 CD가 내 손에 들어왔을 때를 기억한다. 곡의 첫 느낌은 독특했다. 극도로 섬세한 감정을 예리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하는 여느 바이올린곡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 무겁게 시작하는 첫 음에 뒤이은 바이올린의 애절한 소리. 그리고 쥐어짜는 듯한 현의 소리. 고문하듯 어두운 구석으로 몰고 가서 감정을 난도질하는 것 같은 소리.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마음이 불편한데 싫지 않았다. 기시감을 느꼈고 중독성이 있어 자꾸 다시 듣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그의 교향곡으로 빠져들었다.

쇼스타코비치의 목숨을 건 전략


 1950년 7월 28일 바흐 기념 행사에서 객석에 앉아 있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1950년 7월 28일 바흐 기념 행사에서 객석에 앉아 있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위키미디어 공용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와 함께 현대 소련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무자비한 숙청과 학살의 스탈린 체제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작곡가. 그러다가 당의 인정을 받은 작곡가. 그러면서도 죽을 때까지 내면의 저항을 느꼈던 작곡가. 이런 간단한 설명만으로도 그의 이름에는 체제의 무거운 억압과 역사의 질곡, 그 속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의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몇 년 전, 잠실 콘서트홀에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공연을 관람했던 날의 일이다. 인터미션 시간에 공연장 바깥에 나가서 바람을 쐬고 들어오는데, 어느 젊고 세련된 아가씨가 친구와 나누는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내가 쇼스타코비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나 말고도 그를 좋아하는 여성이 있다니. 게다가 현대적인 젊은 여성이 아닌가.


쇼스타코비치는 역사, 저항, 이런 단어에 익숙한 나의 세대 특히 나 혼자만이 좋아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그 후로 찾아갔던 공연장마다 객석은 언제나 만석이었고 연주가 끝날 때마다 그의 팬들이 좌석을 박차고 일어나 공연장이 떠나가도록 손바닥을 마주치며 열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뒤늦게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왜 더 일찍이 그를 알지 못했을까. 거기에는 젊은 세대는 실감 못하는 20세기의 냉전 시대가 한몫했다. 1980년대까지 한국 사회에서 그의 음반은 금지곡이었다. 1960년대 어느 공연에서는 그의 곡이 연주회 목록에 올라갔다가 황급히 삭제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영국 작가 줄리언 반스가 쓴 <시대의 소음>은 쇼스타코비치를 소재로 쓴 소설이다. 줄리언 반스는 아이러니 기법으로, 스탈린 체제에서 쇼스타코비치가 예술과 생존 사이에서 벌였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실감 나게 보여준다. 자신의 예술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거짓말을, 때로는 침묵을, 때로는 위선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한 예술가의 웃픈 현실, 웃음이 나지만 사실은 슬픈 장면이 곳곳에서 펼쳐진다.

첫 번째 위기는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의 초연 후였다. 관람하던 스탈린이 중간에 퇴장하고 이틀 후 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다"라는 제목의 비판 기사가 나오자, 그날부터 쇼스타코비치는 파리 목숨이었다.

쇼스타코비치는 밤마다 짐을 싸놓고 문 앞에서 비밀경찰을 기다린다. 아내와 아이가 깰까, 짐을 싼 가방과 함께 엘리베이터 앞에서 잠을 잔다. 심지어 그는 당의 소환을 당한 뒤, 이제 죽었구나(그때는 소환되면 바로 사형이었다) 하고, 자신을 소환한 심문관을 찾아갔는데, 그 심문관이 출근하지 않아서(바로 그 심문관이 사형당한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당 앞에 자신을 입증하기 위해 4개월 만에 새로 완성한 곡.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D단조. 강렬하게 시작하는 1악장의 도입부는 매번 들을 때마다 강한 충격을 준다. 단호하고 집요하게 '빠빰 빠밤'하고 울려대는 칼날처럼 예리한 선율.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운명을 두드리는 소리'로 알려진 '빠빠빠빰, 빠빠바빰'과는 또 다른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떤 돌이킬 수 없는 파국 속으로 이끌리는 느낌이 든다.

그러다가 2악장 스케르초에 이르면, 가볍고 익살스러우면서도 어딘가 뒤틀린 듯한,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멜로디가 빠르게 춤을 추듯 흘러나온다. 말할 수 없는 비탄과 슬픔을 표현하는 악장은 3악장. 가장 애절한 악장이며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첼로 소나타에서도 느껴지던,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정조가 이어진다. 4악장은 트럼펫과 트롬본의 깜짝 놀랄 만큼 강렬한 소리로 시작한다. 금관악기와 팀파니가 주도하는 빠르고 힘 있는 행진. 정신없이 질주하다가 장렬하게 끝나는 종결부.

초연은 성공적이었다. 청중은 한 시간 동안 기립박수를 쳤다. 음악평론가, 기관지 모두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잘 구현한 낙관적인 곡이라고 칭송했다. 특히 4악장은 소련 당국이 "사회주의의 승리"로 받아들인 부분이다.

하지만 후대의 기록은 다르게 말한다. 그가 이 4악장에 스탈린 체제에 대한 저항을 숨겨두었다고 말이다. 4악장을 들으면 비정상적 에너지가 느껴진다. 총살당할지도 모르는 위협과 강요된 승리의 느낌을 남겨둔 것, 이것이 바로 쇼스타코비치의 목숨을 건 전략이었다고 해석한다.

억압된 체제를 보여준 천재 음악가

 2019년 11월 23일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안드레이 보레이코 지휘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공연 후 무대인사하는 모습
2019년 11월 23일 서울시립교향악단이 안드레이 보레이코 지휘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공연 후 무대인사하는 모습 서울시향

냉전의 시대는 갔다. 그렇다고 평화의 시대가 온 것은 아니다. 전쟁과 독재의 위협은 언제고 되살아나는 불씨처럼 세계 곳곳에서 잠재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트럼프의 끝 모를 광기로 중동 지역에서 터뜨린 화염이 하루하루 우리의 심장을 졸이게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흔히 음악이 역사와 현실을 망각하게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지난 역사를 상기시키는 힘을 지녔다.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국가 폭력이 남긴 상처와 음울한 정조, 브레이크 없는 전차처럼 돌진하는 음들 이면에 숨어 있는 깊은 불안과 비애. 그것은 지난 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잔상과 무관하지 않다.

일찍이 전혜린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교향곡 5번 3악장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그것은 인간 슬픔의 막다른 골목이며, 더 이상 갈 곳 없는 비애의 극한이며, 어떤 구원도 거부된 절대의 고독이다."

그랬다. 역사에서 비껴서 있었던 전혜린조차 느꼈던 비애. 나는 그것을 시대에 대한 깊은 멜랑콜리로 이해한다. 강박적으로 돌진하는 듯한 요란한 행진곡을 들을 때면 군사독재 시대의 망령이 떠오르고, 그 뒤에 뒤따르는 서정적인 멜로디는 체제와 개인 사이의 깊은 불화를 느끼게 한다. 뿔테 안경 아래 불안해 보이는 눈빛 사이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듯한 쇼스타코비치의 미간 주름. 그것은 체제와의 내적 불화에 대한 신체적 표현일지도 모른다.

쇼스타코비치와의 대담 내용을 담은 <증언>에는 그가 제자 로스트로포비치에게 강조했다는 말이 나온다. "우리는 모두 음악의 전사들일세. 어떠한 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아 인간을 옹호해야 하는 전사들……."

평생을 겉으로는 체제에 순응하는 듯했지만, 사실은 체제에 저항했던 작곡가. 그럼으로써 그 억압된 체제의 분위기를 산증인처럼 보여주는 천재 음악가. 그의 음악을 가볍게 감상하려면, <두 번째 왈츠>나 아들의 19세 생일 선물로 작곡한 밝고 경쾌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감상하는 게 좋다. 하지만 그의 음악을 통해서 우리가 거쳐온 20세기의 반쪽을 느껴보려면 교향곡을 들어보는 편이 좋다. 5번, 7번, 8번, 10번, 11번, 13번……. 그의 교향곡은 한 곡 한 곡이 다 역사이니까.
#쇼스타코비치 #쇼스타코비치교향곡5번 #두번째왈츠 #시대의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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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소설집 3권과 엔솔로지 2권을 냈다. 여성주의에 관한 논문을 썼다. 중학교 교사로 국어를 가르쳤고 대학에서 소설창작을 가르쳤다. 지금은 전업작가. 문학 외에도 다양한 예술 장르를 좋아하고 즐겨 감상한다. 문학과 예술이 하나가 되는 삶을 꿈꾼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문학과 예술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사회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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