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전 상처를 간직한 공간, 소설 속으로 들어오다

[서평] 김금희 작가의 <대온실수리보고서>

등록 2026.06.08 17:13수정 2026.06.08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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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기사에는 서평 소설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모든 궁궐은 화려하고 아름답다. 한 시대를 상징하는 뛰어난 건축미와 역사적 가치는 물론, 규모도 웅장하다. 하지만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알고 있거나 잘 모르는 참혹한 이야기도 있다.


최고 권력자가 사는 곳이자 아름답고 화려하기에 더 비극이고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의 공간이 궁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저 두껍고 높은 성벽 너머에는 당시를 살았던 왕과 왕족, 귀족, 노예들의 아름답고 참혹하면서 슬픈 서사가 이어져 온다.

김금희의 소설 <대온실수리보고서>(2024년 10월 출간)을 읽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도 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뭔가를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결의가 생겼다. 나는 발걸음을 창경궁으로 향했다. 소설 속 인물들이 거닐거나 머물던 공간을 직접 보고 싶었다.

창경궁대온실 창경궁대온실전경이다.
▲창경궁대온실 창경궁대온실전경이다. 김인철

창경궁대온실과 낙원하숙

소설은 창경궁이라는 궁궐의 내밀한 공간에서 벌어졌던 역사적 상처와 비극을 다룬다. 일본이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왜곡시켰던 '창경궁'의 역사적 상처를 소설의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온다. 절대 권력의 상징인 궁궐이 동물원이 된 사례는 창경궁이 유일할까? 아니다. 오스트리아의 <쇤브룬 궁전 동물원 (Tiergarten Schönbrunn)>이나 영국의 <런던 탑 동물원 (Royal Menagerie at the Tower of London)>사례가 있다.

하지만 쇤브론 궁전과 런던 탑 동물원이 황실 주도로 근대 학문과 결합하며 자연스럽게 세계적인 관광 명소가 되었다면, 창경원은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빼앗고 조선 왕실을 모욕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김금희 소설가는 백년 전 역사적 상처를 간직한 '창경궁대온실'을 소설 속으로 끌고 들어온다.


대온실수리보고서 김금희 작가의 소설 대온실수리보고서 표지
▲대온실수리보고서 김금희 작가의 소설 대온실수리보고서 표지 김인철

이 소설은 처음에는 심심하고 밍숭밍숭하다. 도파민을 치솟게 하는 자극적인 갈등이나 사건 대신
'창경궁 대온실'과 '낙원하숙' 두 공간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일상을 주인공 영두의 시선으로 평이하고 담담히 묘사한다. 하지만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두 공간에서 흩어져 있던 과거의 인연과 사건들, 현재의 사건들이 촘촘하게 얽히면서 처음 느꼈던 밍숭밍숭함은 단단한 여운으로 변모한다.

'창경궁 대온실'은 역사적 상처를 간직한 서사의 공간이자 주인공 영두가 '대온실수리보고서'를 작성하는 일터다. 창경궁대온실을 본래 모습으로 복원해 나가는 과정은 영두와 리사를 비롯한 낙원하숙을 살았던 이들이 깊이 묻어둔 상처와 갈등을 치유하는 과정과 일치한다.


'낙원하숙'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위로와 연대의 공간이다. 낙원하숙 주인인 문자 할머니(과거의 마리코)를 중심으로 영두와 리사, 그리고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하숙생들이 모여 살며 오해와 이해 사이에서 비롯된 갈등, 서로의 상처를 치유한다.

소설의 변곡점

대온실 창경궁동궐에 있는 대온실이다.
▲대온실 창경궁동궐에 있는 대온실이다. 김인철

대온실 창경궁대온실 내부
▲대온실 창경궁대온실 내부 김인철

대온실 대온실 천장
▲대온실 대온실 천장 김인철

이 소설이 개인의 아픔과 상처를 넘어 일제강점기 역사적 상처의 담론으로 확장되는 계기는 대온실 수리 공사 중 예상치 못한 '인골(유물)'이 발굴 되면서부터다. 아파트 재개발 현장에선 종종 유물이 나오기도 한다.

데이터를 분석해보니 지하 벽면과 계단 같은 건물지 잔족 흔적들이 발견됐고 하나의 공간이라 할수 있는 분리대가 보였다. 도기, 나무, 철제, 특히 유리 반응이 많아 아무래도 배양실쪽 더 합리적일 것 같은데 반응 모양이 뼈들로 추측되는 데이터가 나온 거였다.

- p.167

아파트 건설 현장 같은 곳에서 발견되는 유적이나 유물은 우리의 일상과 단절되었던 시간의 유물이라면, 창경궁 대온실의 '오래된 인골'은 현재의 삶과 관련된 '생생한 상처'다. 이는 개인에게나 국가에게나 마땅히 청산 되었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한 근현대사의 슬픔이자 비극이다. 예기치 못한 유골의 발견은 낙원하숙을 거쳐갔던 이들의 개인적인 상처와 슬픔이 거대한 역사의 아픔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이러한 상처와 갈등의 중심에 '리사와 영두' 두 인물이 있다. 리사와 영두는 어릴 적 친구였지만 친구가 아닌 관계였다. 두 사람은 심리적으로나 외적으로 상당히 복잡한 관계다. 리사는 어린 시절 뿐만 아니라 성인이 된 후에도 영두에게 이기적이고 모나게 군다. 리사가 영두를 못살게 구는 건 그녀의 할머니이자 낙원하숙 주인인 문자 할머니 때문이다. 문자 할머니가 영두를 아끼는 것에 대한 질투와 불안이 리사의 미움으로 번져갔다.

대온실 전경 창경궁 대온실은 1909년에 완공된 대한민국 최초의 서양식 식물원으로, 순백의 철골 구조와 유리창이 어우러져 이국적이면서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과거 일제가 순종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던 역사적 상처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 역사성과 가치를 인정받아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김금희 소설가의 '대온실수리보고서'의 배경이다.
▲대온실 전경 창경궁 대온실은 1909년에 완공된 대한민국 최초의 서양식 식물원으로, 순백의 철골 구조와 유리창이 어우러져 이국적이면서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과거 일제가 순종 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던 역사적 상처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 역사성과 가치를 인정받아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김금희 소설가의 '대온실수리보고서'의 배경이다. 김인철

나는 우리 사이의 갈등을 감추면서까지 할머니에게 잘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리사가 그런 못되고 배은망덕한 애라는 걸 알리고 싶은 마음이 있기도 했었고 하지만 그쯤은 이제, 아무것도 아닐정도로 나도 여기에 적응했다는걸 자랑하고 싶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그런식으로 서로의 성장을 견주고 있었다.

- p. 104

리사는 그녀를 낳아준 친부모에게 사랑과 보호를 받지 못했다. 리사에게 낙원하숙과 문자 할머니는 유일한 안식처와 보호자였다. 그런 리사에게 영두의 등장은 유일한 안식처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리사는 영두를 괴롭히고 미워함으로써 불안을 잠재웠다. 리사가 영두를 미워했던 이유가 유일한 안식처인 낙원하숙과 문자 할머니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었듯, 다른 하숙생들 역시 세상에서 밀려나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도 낙원하숙은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안식처였다.

이해와 용서

영두는 대온실을 수리하고 인골을 발굴하는 과정을 통해 과거 리사가 왜 그토록 자신에게 못되게 굴었는지, 그녀의 외로움과 불안했던 삶을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비슷한 것과 같은 것은 다르다. 오렌지와 귤이 생김새는 비슷해도 다른 과일이듯 이해와 용서도 다르다. 영두가 리사를 이해했다고 해서 그녀를 용서한 것은 아니다. 다만 리사의 불안과 아픔을 들여다보며 영두는 과거에 붙들려 있던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고 조금씩 치유해 나간다.

소설 <대온실수리보고서>의 가장 큰 매력은 앞서 언급했듯 창경궁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낙원하숙이라는 '개인적 서사'를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자연스럽게 엮어낸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과거의 상처를 억지로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창경궁 대온실의 깨지고 금 간 유리를 보수하듯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위로라고 말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네이버 블로그와 다음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

김금희 (지은이),
창비, 2024


#김금희 #소설가 #대온실수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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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 뉴스 시민기자입니다. 사회복지사입니다. 할수있지만 하지 않을 자유를 소망합니다. 제14회 전태일 문학상(소설)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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