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종호씨가 순창에서 광주로 들어가 겪었던 끔찍했던 경험에 대해 기자에게 설명하고 있다. 당시 임씨는 서른네 살이었다고 밝혔다.
김경준
막혀버린 길, 그리고 헬기 소리와 총성
광주에 살던 사람들이 공포에 벌벌 떨며 도시에서 탈출하거나 집에서 숨죽이고 있던 그 참혹한 순간에 오히려 외지에서 광주로 들어간 사람도 있었다. 광주에 살던 친동생의 실종 소식을 들은 다음 날, 광주로 가겠다고 결심한 자가 바로 임종호씨다.
하지만, 광주로 진입하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군인들이 길목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고, 지역 주민들은 위험한 사지로 들어가려는 그를 필사적으로 만류했다.
"담양 기계공고 앞에서 군인들이 딱 지키고 서서 못 가게 하더라고요. 겨우 길을 찾아서 광주로 우회해 들어갔죠. (광주에서)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있어도, 들어가는 사람은 나밖에 없더라고요. 그래도 '사람이 대장부로 태어나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하는 마음으로 그냥 광주로 들어갔죠."
광주 시내에 들어가자, 삼엄한 경계 속에서 군인들과 맞닥뜨렸다. 동생의 시체라도 찾겠다는 일념으로 들어간 그곳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전쟁터였다.
"오전 8시쯤 되었던 것 같은데, 하늘에 비행기랑 헬기가 마이크로 방송을 해대며 날아다니고, 사방에서 총소리가 쿵쿵 울려 퍼지는데 완전 난리였죠. 군인들이 2인 1조로 수색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군인이 나를 보더니 총에 달린 대검으로 나를 쿡 찔렀어요. 그 순간 식은땀이 쫙 흘렀습니다."
"후세들이 그날의 아픔을 명확히 기억해 주기를"
46년 전 그날의 참혹했던 현장을 직접 몸으로 겪은 그는 최근 광주항쟁을 왜곡하거나 폄훼하려는 일부 움직임에 대해 깊은 우려와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 당시 계엄군들의 폭언과 만행은 입에 담기도 힘들어요. 적군도 아니고 우리 한국 군인들이 우리 동포를 죽이는 세상이었으니, 누가 누구를 믿고 살 수 있었겠습니까."
그때는 동생을 찾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겁 없이 들어갔던 것이라고 담담히 말을 이어가던 임 씨는 후손들이 그날의 진실을 왜곡 없이, 명확하게 기억해 주기를 바랄 뿐이라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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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순창군에 거주하는 김경준입니다. 순창군과 중동 지역의 뉴스에 관심을 갖고 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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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잡이 딸 안고 떨던 밤, 도청 앞 시신들... 5·18 생존자들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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