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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떻게 살고 있냐' 묻는 것 같은 김남주 시인의 시비

김남주 시인 태 자리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

등록 2026.05.28 09:02수정 2026.05.28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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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주의 태 자리인 해남 봉학마을 풍경. 물논에 반영돼 비친 마을과 산세가 아름답다.
김남주의 태 자리인 해남 봉학마을 풍경. 물논에 반영돼 비친 마을과 산세가 아름답다. 이돈삼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앞서 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주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언젠가는 가야 할 길….'

김남주의 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의 일부분이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은 노래로도 만들어져 많이 불렸다. 노랫말을 흥얼거리다 보면 차갑던 마음이 금세 뜨거워짐을 느낄 수 있다. 민족문학의 큰별로 우리 가슴속에서 여전히 살아있는 시인 김남주다.

 현판으로 걸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김남주 생가에 걸려 있다.
현판으로 걸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김남주 생가에 걸려 있다. 이돈삼

김남주를 그저 '시인'으로만 부르기엔 왠지 낯설다. 시인 앞에 단어를 하나 더해야 어색하지 않다. 민족시인, 혁명시인, 전사시인 등. 그의 시는 횃불이었다. 낫이고, 칼이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 현장에서 그의 시는 투쟁 구호였다.


지난 5월 14일과 18일, 흙에서 태어나 강철이 된 김남주(1946⁓1994)의 태 자리를 찾았다. '땅끝'으로 가는 길,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鳳鶴里)다. 어린 김남주가 감수성을 키운 곳이다. 그가 땅을 일구는 농군의 거친 손을 처음 대한 곳이기도 하다. 지명처럼 봉황과 학이 살 만큼 평화로운 마을이다.

한낮의 마을이 고요하다. 모내기를 끝낸 들녘이 푸르름을 더해준다. 어린 김남주도 봤을 풍경이다. 논물에 반영돼 비치는 마을과 산세도 아름답다. 어쩌다 오가는 트랙터와 용달차가 마을의 고요를 깨운다.

 해남 김남주 생가. 지금은 김남주 문학공원으로 단장돼 있다.
해남 김남주 생가. 지금은 김남주 문학공원으로 단장돼 있다. 이돈삼

 김남주 흉상. 생가 마당 한쪽에 세워져 있다.
김남주 흉상. 생가 마당 한쪽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김남주 생가가 말끔하다. 방치된 생가를 복원하고 단장한 건 20여 년 전이다. 지금은 '김남주 문학공원'으로 이름 붙었다. 생가 처마에 '민족시인 김남주 생가'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굵고 따뜻한 글씨체에서 고 신영복의 작품임을 직감한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도 현판으로 걸려 있다.

마당 한쪽에 김남주 흉상이 서 있다. 김기범 조각가의 작품이다. 안경을 낀 흉상은 그가 감옥에서 그토록 그리워했을 고향의 푸른 하늘과 햇살, 바람을 맞고 서 있다. 그가 감옥에서 생활한 독방도 한쪽에 재현해 놓았다.

 봉학마을 표지석. 해남 봉학은 김남주가 나고 자란 마을이다.
봉학마을 표지석. 해남 봉학은 김남주가 나고 자란 마을이다. 이돈삼

김남주는 삼산면과 화산면 경계에 있던 삼화초등학교와 해남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일고에 합격했다. 김남주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1964년은 박정희가 굴욕적인 한일회담과 베트남 파병을 추진하던 때였다.


학생들의 소극적인 대응에 실망한 그는 2학기부터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획일적인 입시 위주 교육도 마뜩잖아 스스로 학교를 그만뒀다. 검정고시를 거쳐 1969년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늦깎이 대학생이 된 김남주는 3선개헌과 교련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박정희의 시월유신은 김남주의 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친구 이강과 함께 유신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지하신문 '함성'을 만들어 뿌리다가 첫 옥살이를 했다. 학교에서도 제적됐다.


 꽃양귀비와 어우러진 김남주 생가.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 자리하고 있다.
꽃양귀비와 어우러진 김남주 생가.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 자리하고 있다. 이돈삼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 김남주는 1974년 '진혼가' '잿더미' 등 8편의 시를 <창작과 비평>에 발표했다. 시인 김남주 탄생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시는 유신독재에 맞서는 무기였을 뿐이다. 시인이기에 앞서 전사의 길을 걸었다.

'나는 나의 시가/ 오가는 이들의 눈길이나 끌기 위해/ 최신 유행의 의상 걸치기에 급급해 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바라지 않는다 나의 시가/ 생활의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순수의 꽃으로 서가에 꽂혀/ 호사가의 장식품이 되는 것을…'

김남주의 시 '나는 나의 시가'의 앞부분이다.

 김남주가 광주에 연 카프카서점 자리. 동부경찰서 옆 학원가에 있었다.
김남주가 광주에 연 카프카서점 자리. 동부경찰서 옆 학원가에 있었다. 이돈삼

김남주는 1975년 광주에 사회과학서점 '카프카'를 열었다. 광주의 첫 사회과학서점이었다. 지금의 광주동부경찰서 옆 학원가다. 서점은 반독재 운동의 사랑방이 됐다. 정보기관의 감시망이 촘촘해졌다. 사업도 적성과 맞지 않았다. 서점은 2년 만에 문을 닫았다.

김남주는 유신 반대운동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1979년 지하조직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으로 붙잡혀 징역 15년 형을 받았다. 그는 독방에서 우유갑을 뜯어낸 은박지와 변소(뺑끼통)에서 쓰는 누런 종이에 시를 썼다.

 김남주 시비. 김남주 문학공원에 설치돼 있다.
김남주 시비. 김남주 문학공원에 설치돼 있다. 이돈삼

 김남주 문학공원에 설치된 독방. 김남주의 감옥생활을 엿볼 수 있다.
김남주 문학공원에 설치된 독방. 김남주의 감옥생활을 엿볼 수 있다. 이돈삼

그의 감옥생활을 엿볼 수 있는 편지 복사본과 생전 사진이 생가 안방에 걸려 있다. 마당에 시비(詩碑)도 세워져 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자유' '노래' '진혼가' '조국은 하나다' '나의 칼 나의 피' 등이 시비와 조형물로 세워졌다. 민족문학의 한 획을 그은 그의 시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시가 '너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냐'고 묻는 것 같다.

김남주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30년 넘었다. 광주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잠들어 있다. 그가 격하게 싸웠던 유신독재와 군부독재도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김남주가 외친 자유와 평등의 가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과제다. 양극화, 개인주의, 혐오는 그가 그토록 타파하려던 모순의 연장선이다.

김남주 생가는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끈질긴 사랑과 대지의 생명력을 일깨워준다. 해남과 삼산면, 그리고 봉학마을은 김남주 문학의 자양분이 된 공간이다.

 김남주 기념홀.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건물 안에 설치돼 있다.
김남주 기념홀.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건물 안에 설치돼 있다. 이돈삼

해남 봉학마을이 김남주의 원초적 고향이라면, 그를 전사로 거듭나게 한 사상적 고향은 전남대다. 전남대학교 인문대 앞에 '김남주뜰'이 만들어진 이유다. '전남대민주길'의 핵심 공간 가운데 하나다. 김남주뜰 바닥에 그의 대표작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 새겨져 있다.

인문대에 '김남주 기념홀'도 만들어져 있다. 전사로 산 그의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전시관과 세미나실로 이뤄져 있다. 독재정권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학교에서 제적된 그가 자랑스런 선배로 다시 돌아온 셈이다.

김남주는 감옥에서 얻은 지병으로 1994년 생을 마감했다. 시집으로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등이 있다.

 민족시인 김남주의 묘. 광주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있다.
민족시인 김남주의 묘. 광주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있다. 이돈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김남주생가 #김남주문학공원 #해남봉학마을 #해남군삼산면봉학리 #함께가자우리이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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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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