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임신자랑 임신은 행복버튼이다. 뭘해도 행복한 순간. 임신 예찬 중 인공지능(AI)을 활용해 만든 이미지
정현주
일단 입덧의 괴로움이 없었다. 오히려 터지는 입맛으로 행복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평소 두 조각이면 포크를 내려놓던 입 짧은 내가 치킨 두 마리를 먹는 먹방 쇼를 했다. 다이어트에서 공식 해방된 임산부라는 존재감은 그 자체로 '멋진 신세계'였다.
명색이 임산부인데 너무들 걱정을 안 해줘서 발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구수한 된장찌개 앞에서 갑자기 구역질을 한다거나, 자장면 한 그릇을 원샷하고 소화가 안 된다며 가슴을 치는 '임신 관심병사'가 되어보기도 했다. 물론 본능적인 식욕 앞에서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D라인도 자랑스러웠다. 마른 체형이었던 나는 임신 초기부터 아랫배가 나오길 기다렸다. 가능하다면 배꼽에 대고 바람이라도 불어 풍선처럼 커지게 하고 싶었다. 허리 라인을 지우며 점점 커지는 배는 내 자존심의 증거였다.
스물다섯 살부터 운전대를 잡은 경력직 오너 드라이버는 임신과 동시에 핸들을 놓았다.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다. '전국임신자랑'을 하기 위해서다. 불룩 나온 배를 내밀며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는 일이 좋았다. 임산부 좌석이나 내 배를 보고 자리를 양보해 주는 사람들에게 괜찮다며 인사를 하는 것도 즐거웠다. 만인에게 인정받는 임산부가 된 기분이랄까.
무엇보다 든든했다. 뱃속에서 조용히 있던 아이가 어느 순간 발로 차며 존재감을 드러낼 때마다 반가웠다. 덩치가 커지면서 배 위로 꿀렁거리며 보여주는 바디랭귀지에는 박수를 치며 대꾸를 해주었다. 혼자 길을 걸어도 함께 걷는 느낌, 곁에 있다고 통통 말을 걸어주는 것 같아 외롭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돌이켜 보면 나는 임신이라는 시간을 누구보다 신나게 통과한 사람이었다.
자신만의 빛나는 스토리를 써나갈 아이에게
"선배, 저 임신했어요."
"어머! 너무 축하해. 와. 너무 잘 됐다!"
2년 전 회사 후배의 임신 커밍아웃은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긴 셈이었다. 나의 흥분 버튼인 '임신 버튼'이 삐— 하고 신호음을 울리자 이야기가 쏟아질 준비를 했다. 하지만 당시 마흔 둘이었던 후배는 준비가 안 되었다. 그날도 오전에 산부인과에 고령 임신 검사들을 하고 왔다고 했다.
나는 임신이 얼마나 행복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인지 신나게 떠들어댔다. 심지어 남들은 막달이 다가오면 빨리 낳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는데, 나는 임신 열 달에 몇 달쯤 추가 옵션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딸을 39주 4일째 낳았는데 어찌나 아쉬운지. 마흔 노산에도 2시간 만에 자연분만 성공!'
이렇게 나의 임신 드라마는 어느새 웅장한 대하 드라마가 되었고, 후배는 새로운 임신 드라마에 입덕을 시작했다. 자신과 아이가 주인공인, 해피엔딩 드라마를.
'띠리리리 띠리리리.'
그런데 요즘 나의 감정워치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 액정을 들여다보니 두 글자가 선명하다. '불안' 오늘만 해도 몇 번째인지 모른다.
재수를 시작하고 딸아이는 조잘대던 말을 잃었다. 조용한 딸아이 방이 궁금해 슬그머니 방문을 밀어보았다가 문틈 사이로 마주친 딸의 눈빛에서 총알이 날아온다. 어디 가냐는 물음에는 뭐가 그렇게 궁금하냐며 날이 서고, 오늘은 어땠냐는 질문에는 알아서 하고 있으니 그만 좀 하라는 공격이 돌아온다. 집안 행사에는 단골 불참러가 되었고, 입맛도 변했는지 좋아하던 김치찜 약발도 예전 같지 않다.
고3 때는 그래도 괜찮았다. 눈 뜨면 싫다면서도 가야 할 학교가 있었고, 맨날 붙어 다닌다고 잔소리를 해도 뭉쳐다니던 친구들이 있었다. 하지만 재수생활은 달랐다. 학교처럼 소속된 곳이 없고, 친구들과는 서로의 계절이 어긋난 느낌이다.
어쩌면 이 아이는 지금, 인생에서 가장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하루하루를 건너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불안하고, 막막한 미래 앞에서 자꾸만 작아지는 시간들.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어요?"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할 것이다. 바로 이 아이를 임신했을 때라고. 그래서일까. 자기 삶의 가치를 잃어버린 듯 흔들리는 아이를 보면 큰 소리로 말하고 싶다. 너는 반드시 너의 빛을 찾아낼 거라고.
'내 인생 최고의 가치'였던 순간의 주인공이 지금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언젠가 우리 딸의 감정워치에도 다시 초록 불이 들어오기를. 자신만의 빛나는 스토리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써 내려가기를.

▲ 감정워치에 초록 불이 들어온 장면.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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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간 공중파 방송작가로 활동했습니다. 10년간 광고홍보 프로덕션을 운영했습니다. 현재는 브런치 크리에이터,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2025 국민이 함께하는 저작권 글 공모전-국무총리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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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는 재수생 딸에게 하고 싶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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