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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또다시 배신당하겠지만

[시로 읽는 오늘] 황규관 '약속'

등록 2026.06.11 09:05수정 2026.06.1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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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작가회의 시분과위원회에서 기획한 '시로 읽는 오늘'을 연재합니다. 시로 아침을 시작한다면, 수많은 갈등과 전쟁도 줄어들 것입니다. 독자들은 힘 있는 언어를 익혀 튼튼한 내면을 가꿀 수 있고, 다양한 시를 통해 새로운 시민의 감수성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의 첨예한 문제를 시인의 예민한 감각으로 길어 올린 한국시를 매주 두 편씩 선정하여, 추천 글과 함께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기자말]
약속
- 황규관

약속이 나를 버려서 혼자 밥을 먹는다
돌아보면 약속은 언제나 오지 않았고
나도 가끔 약속을 버렸다
식당 창밖으로 비가 내릴 때 드디어
밥이 내 앞에 나타났다
(진짜 약속은 김 오르는 밥이라는 듯
고요한 한끼 먹고 일어서라는 듯)
나를 버린 약속이 밥을 먹이는 건 아닐 텐데
이때만큼은 나를 버린 약속을 잊고
어 뜨거, 숟가락 가득 어둠 속으로
약속이 떠난 슬픔을 밀어 넣는다
약속만 한 고문이 역사에 없었고
약속만 한 설렘도 없었고
약속만 한 설움도 없었지만
오늘은 약속에게 버림받은 내가 제일 뜨겁다
밥이 몸에 흔적을 남기면
약속은 다시 나를 두드릴 것이다
이번에는 문을 열어주지 말아야지,
허튼 다짐도 해보겠지만
밥이 끝나는 지점에서 약속은
아스라이 시작되고
약속이 사라진 데서 밥은
내 허기 쪽으로 밀어닥친다
약속이 밥을 먹이고
밥이 약속을 자꾸 키운다


출처_ <뒤로 걷는 길> 창비, 2025
시인_황규관: 1993년 <전태일 문학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패배는 나의 힘>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호랑나비> <뒤로 걷는 길>이 있다.

 약속은 깨졌고, 밥은 식지 않았고, 나는 뜨거워졌다.
약속은 깨졌고, 밥은 식지 않았고, 나는 뜨거워졌다. 박유하 시인(디지털 포엠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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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안으로 들어서다 거울에 비친 사람들을 보았다. 허기진 얼굴로 묵묵히 작은 어둠 속으로 밥을 밀어 넣고 있었다. 새벽 식당 문을 열 때 먹은 첫 끼니부터 하루의 마지막 밥까지. 약속은 어느덧 설렘에서 기약 없는 기다림으로 바뀌었지만 두고 볼 일이다. "약속이 밥을 먹이고 밥이 약속을 자꾸 키우"기 때문이다.

약속이라는 것만큼 인간의 희비를 가르는 관념어가 또 있을까. 누군가의 희망은 나의 절망이기도 하다. 만선과 공선, 귀환과 죽음, 관계의 회복과 이별 등 수많은 우연이 있다. 우리는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보편적인 기다림을 반복하는 존재들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짜 약속은 김 오르는 밥이라는 듯 고요한 한 끼 먹고 일어서라는" 시인의 구체적인 말처럼 상처받은 영혼을 먼저 달래고 볼 일이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보행기 안에 초록 화분을 실으며 웃음을 짓듯, 매일 세수를 하고, 벗은 신발을 정리하며 스스로에게, 그리고 곁을 준 타인에게 오늘도 고생했다는 말을 건네 보는 것. 우리는 또다시 배신당하겠지만 반복되는 약속의 하루를 기꺼이 살아가는 것이다. (정미주 시인)
#황규관시인 #약속 #뒤로걷는길 #한국작가회의 #시분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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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국작가회의는 이 땅의 대표적인 문인단체로서 표현의 자유와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정신을 계승한다.


톡톡 6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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