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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소 앞에서 어린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한 질문... 짧지만 묵직했다

손녀의 한마디와 공보물 더미가 남긴 과제

등록 2026.06.03 13:49수정 2026.06.03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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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투표소로 향하는 길은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했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거리를 누비던 유세 차량의 확성기 소리는 자취를 감췄고, 교차로마다 서서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던 후보자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며칠 동안 도시를 채웠던 선거의 열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거리에는 낯선 적막감만이 남아 있었다.

선거운동은 끝났고, 이제 모든 판단과 선택은 유권자의 몫이 되었다. 후보자들의 약속과 호소는 멈췄지만, 그들이 남긴 공약과 지역의 미래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유권자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투표장으로 향하면서 나는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을 했다. 떠들썩했던 선거운동보다 더 무거운 시간이 시작되고 있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거리 유세에 나선 후보자가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후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정책과 비전을 알리며 유권자의 지지를 호소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거리 유세에 나선 후보자가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후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정책과 비전을 알리며 유권자의 지지를 호소했다. 진재중

투표소에서 만난 지역소멸의 그림자

강릉 사천면의 투표소 입구에는 어르신들의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오는 노인들, 손주와 함께 투표소를 찾은 노부부, 투표 순서를 기다리며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는 주민들의 모습이 이어졌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끼리 안부를 묻는 모습에서는 시골 마을 특유의 정겨움도 느껴졌다.

반면 젊은 층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투표소의 풍경은 단순한 선거 현장이 아니라 지역이 겪고 있는 인구구조의 변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젊은이들은 일자리와 교육을 찾아 도시로 떠나고, 마을에는 고령층이 남아 있는 현실이 투표 현장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모습은 단순한 세대 간 참여율의 차이를 넘어 도시와 농어촌의 격차, 그리고 지역소멸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떠올리게 했다.

투표소에서 마주한 어르신들의 모습은 지금의 지역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현재를 보여주었고, 상대적으로 적은 젊은 층의 모습은 지역의 미래에 대한 걱정을 안겨주었다. 지역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선거였지만, 정작 그 미래를 살아갈 젊은 세대의 모습은 많지 않았다. 투표소를 오가는 주민들의 발걸음 속에서 나는 한 지역의 현재와 미래가 교차하는 모습을 보았다.

 사천중학교에 마련된 투표소로 향하는 유권자
사천중학교에 마련된 투표소로 향하는 유권자 진재중

손녀의 질문


이른 아침 투표소 앞.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작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투표권이 없는 어린 손녀가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함께 투표소를 찾은 것이다. 선거와 민주주의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어린 나이였지만, 아이의 눈빛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아이가 던진 한마디는 어른들에게 선거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이 되었다.

"할아버지, 누구 찍을 거야?"


할아버지는 잠시 웃으며 대답했다.

"번호대로 찍을 거란다."

그러자 손녀가 곧바로 되물었다.

"왜?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공약 보고 찍어야지."

어린 손녀의 질문은 짧았지만 묵직했다. 선거는 사람이나 정당의 이름이 아니라 후보자가 제시한 정책과 공약을 살펴보고 선택하는 과정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투표권조차 없는 아이였지만, 학교에서 배운 민주시민 교육을 통해 유권자의 책임과 선택의 의미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대답에는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익숙한 투표 습관과 선거 문화가 담겨 있었고, 손녀의 질문에는 후보자와 정책을 스스로 판단하려는 새로운 세대의 인식이 담겨 있었다. 불과 몇 마디 되지 않는 대화였지만, 그 사이에는 세대 간의 정치 참여 방식과 선거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강릉시 사천면 투표소에 게시된 투표소 안내 현수막
강릉시 사천면 투표소에 게시된 투표소 안내 현수막 진재중

민주주의가 남긴 종이의 무게

집으로 돌아와 책상위에 놓여있던 투표안내문과 선거공보물을 펼쳐보았다. 도지사, 교육감, 시장·군수, 지방의원 후보들의 공약과 이력이 담긴 책자들이 봉투안에 담겨있었다.

"이 많은 종이들은 결국 어디로 갈까."

선거가 끝난 지금, 집 안에 남겨진 선거공보물들은 대부분 비슷한 운명을 맞는다. 일부는 유권자들의 손에 의해 꼼꼼히 읽히지만, 상당수는 한 번 훑어보거나 아예 펼쳐보지도 못한 채 재활용품으로 분류된다. 공보물은 유권자에게 후보자의 정책과 공약을 알리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선거 기간 동안 막대한 예산과 종이를 들여 제작·배포된 공보물 가운데 적지 않은 수량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채 버려지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물론 이는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일 수 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인쇄되고 배포되는 엄청난 양의 종이를 떠올리면, 과연 지금의 방식이 가장 효율적인 정보 전달 방법인지 고민하게 된다. 선거가 끝난 뒤 남겨진 종이 더미는 민주주의의 가치와 환경적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라는 또 다른 과제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해양환경을 기록하고 바다숲 복원을 이야기해 온 사람으로서 더욱 그랬다.

한 권의 공보물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다. 그 종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무가 필요하고, 인쇄와 운송 과정에서는 에너지가 소비된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탄소중립을 외치고, 기후위기를 걱정하며, 사라지는 숲과 생태계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는 선거 때마다 엄청난 양의 종이를 생산하고 버리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선거 기간 동안 각 가정에 전달된 투표안내문과 선거공보물.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필수 자료이지만, 선거 이후 대량의 종이 폐기물이 발생하면서 디지털 공보물 도입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선거 기간 동안 각 가정에 전달된 투표안내문과 선거공보물.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필수 자료이지만, 선거 이후 대량의 종이 폐기물이 발생하면서 디지털 공보물 도입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진재중

민주주의의 비용, 다시 생각해 볼 때

만약 선거공보물의 상당 부분을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한다면 어떨까. 종이 공보물이 꼭 필요한 유권자에게는 기존 방식대로 제공하되 스마트폰과 인터넷 활용이 가능한 시민들에게는 전자공보물과 정책 영상을 제공하는 방법도 충분히 검토해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절감된 예산은 청년 일자리, 복지, 환경 보전, 지역 현안 해결과 같은 더 중요한 분야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투표소에서는 지역의 미래를 고민했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쌓여 있는 선거공보물 더미를 바라보았다. 하나는 지방자치의 과제였고, 다른 하나는 지속가능성의 과제였다. 지방선거는 단순히 지역의 지도자를 뽑는 절차가 아니다. 지역의 미래를 설계하고, 다음 세대에게 어떤 공동체를 물려줄 것인지를 결정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무엇을 개발하고 무엇을 약속할 것인가를 넘어, 선거를 치르는 방식 또한 시대의 변화에 맞게 개선할 필요가 있다.

투표는 끝났지만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는 과연 미래를 준비하는 선거를 하고 있는가.
책상 위에 남겨진 공보물 더미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가치와 환경의 가치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그리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를 묻는 또 하나의 숙제처럼 다가온다. 미래를 위한 선택은 투표함 속 한 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거 문화와 제도를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져야 한다.


#지방선거 #홍보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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