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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기 전 벽화 속 토끼의 '빨간 눈'에서 읽어낸 것

[해아리의 거룩한 장도] 서울 화계사와 수원 팔달사의 '담배 피우는 호랑이'와 '토끼' 벽화

등록 2026.06.08 09:08수정 2026.06.08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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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학예연구사이자 20여 년 동안 문화유산을 연구하고 탐방해 온 문화유산 전문 여행 작가입니다. '거룩한 장도, 한국 호랑이를 찾아서'라는 주제를 지속적으로 다룹니다.[기자말]
생태계에서 호랑이와 토끼는 처음부터 위상이 극과 극인 관계다. 한쪽은 산군(山君)이라 불리는 최상위 포식자라면, 다른 한쪽은 귀를 쫑긋 세우며 살아남는 법을 궁리해야 하는 먹이사슬의 말단에 있다. 그런데 동양의 오행(五行) 체계 안에서 이 둘은 뜻밖의 공통점이 있다.

십이지(十二支)에서 호랑이는 인(寅), 토끼는 묘(卯)로 나란히 오행의 목(木)에 속한다. 목의 기운은 뻗어 오르는 힘, 새벽을 여는 기운, 봄의 기운으로 리더십과 추진력, 권위를 상징한다. 호랑이의 리더십은 강함과 카리스마로 앞장서는 것, 맹렬히 달려드는 힘으로 한때 이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시대는 변한다. 불확실한 시대, 강요보다는 회유와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시기에는 토끼의 리더십이 더 필요하다. '교토삼굴(狡兎三窟)'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꾀 많은 토끼는 굴을 세 개 판다는 뜻으로, 요즘처럼 변화의 폭이 큰 상황 속에서는 임기응변을 통한 적절한 대처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우리 문화유산 속에서 호랑이와 토끼에 대한 작품은 무엇이 없을까 궁금함이 이어지던 차에 흥미로운 벽화가 있다고 해서 지난 5월 31일 서울 화계사로 탐방을 떠났다.

역사를 담은 호랑이와 토끼 벽화

서울 강북구 수유동, 북한산 자락에 자리 잡은 화계사(華溪寺)는 조선 왕실과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특히 흥선대원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가 재야에 있을 때 화계사에서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행했으며, 이에 따라 아들인 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경내는 산기슭의 경사진 지형을 이용해 조성돼 있다. 대적광전 뒤쪽이 중심 구역으로 본전인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측 위쪽으로 단을 하나 높인 삼성각, 우측에는 명부전을 배치한 게 독특했다. 먼저 삼성각에는 산신을 모시고 있었는데 불단 위에는 나무로 깎아 만든 호랑이가, 벽면에는 산신을 우측에서 보좌하는 모습으로 호랑이가 그려져 있었다.

명부전 담배 피는 호랑이와 토끼 벽화 명부전 우측 상단 벽면에 담배 피는 호랑이와 장죽을 시중드는 토끼 그림이 그려져 있다.
▲명부전 담배 피는 호랑이와 토끼 벽화 명부전 우측 상단 벽면에 담배 피는 호랑이와 장죽을 시중드는 토끼 그림이 그려져 있다. 정재학

명부전 현판 화계사 명부전은 조대비의 시주로 1878년 초암 스님이 중건한 건물인데 명부전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명부전 현판 화계사 명부전은 조대비의 시주로 1878년 초암 스님이 중건한 건물인데 명부전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정재학

명부전은 1878년 초암 스님이 조대비의 시주를 받아 중건한 곳으로, 명부전 현판 글씨와 기둥의 주련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건물 내부에 조성된 목조지장보살 삼존상과 염라대왕을 포함한 시왕상(十王像) 일괄은 보물로 지정되었다. 건물의 정면은 통상적으로 앞을 바라보는데, 여기는 대웅전 측면을 향해 배치된 것이 특이했다. 또한 좁고 경사진 지형 때문인지 건물 좌측은 이단으로, 우측에는 기둥 부분까지 3단으로 구획되어 있었다.


좌측 벽면에는 새로운 자재로 보수 되었는지 깔끔했다. 그리고 호랑이와 토끼 벽화가 있는 곳은 바로 우측 벽면이었다. 제일 윗단을 좌우로 나누고 왼쪽에는 호랑이와 토끼를, 오른쪽에는 사슴 등이 그려져 있었다. 건물의 방풍판으로 가려져 있어 쉽게 보이는 곳은 아니었다.

담배 피우는 호랑이 마치 엎드려 절받기식으로 장죽을 기다리고 있는 호랑이의 표정.
▲담배 피우는 호랑이 마치 엎드려 절받기식으로 장죽을 기다리고 있는 호랑이의 표정. 정재학

장죽 시중드는 토끼 호랑이에게 두손 모아 긴 대나무 담뱃대를 내밀어 시중드는 모습이 흥미롭다
▲장죽 시중드는 토끼 호랑이에게 두손 모아 긴 대나무 담뱃대를 내밀어 시중드는 모습이 흥미롭다 정재학

벽화를 천천히 살펴보자. 배경은 휘영청 보름달이 뜬 밤 산중이다. 호랑이의 자세를 보라. 앞발을 세우고 앞으로 바짝 엎드린 자세다. 마치 엎드려 절받기식으로 표정 또한 비굴한 면이 없지 않다. 토끼는 두 마리다. 한 마리는 앞으로 엎드려 공손히 절을 하고 있고 또 한 마리는 두 손 모아 긴 대나무 담뱃대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다. 토끼가 호랑이에게 담배를 대접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이런 기막힌 도안이 생겨난 걸까. 이 그림의 유래로 충청도 황팔도(黃八道)의 전설이 거론된다. 국가유산청 자료에 따른 전설은 이렇다. '효자 아들 황팔도는 어머니의 병 때문에 개의 간이 필요했다. 밤마다 호랑이로 둔갑해 100개의 간을 꺼내 봉양하려 했지만, 99번째에 아내에게 발각된 것. 아내가 결국 둔갑을 위한 부적을 태워 황팔도는 호랑이로 전국 팔도를 떠돌다가 죽임을 당했다'는 전설이다.

해당 자료에 따르면 "(황팔도 전설이) 경기도 지역으로 전파되며 호랑이 모습의 황팔도가 친구나 아들이 준 담뱃대를 물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변이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어리석은 강자 호랑이를 당시 부패하고 무능했던 권력층, 강압과 흉포를 일삼았던 일본인에 비유"했다는 설명도 이어진다. 약자이지만 지혜가 있는 토끼는 조선 민중으로 비유해 위기를 모면하는 생존 전략을 보여줬다는 해석이다.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시대

수원화성 팔달문 수원화성 팔달문 근처에 팔달사가 자리하고 있다.
▲수원화성 팔달문 수원화성 팔달문 근처에 팔달사가 자리하고 있다. 정재학

두 번째 목적지는 경기도 수원이었다. 지난 3일 방문했다. 수원화성은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원침(園寢)인 현륭원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1796년 완공한 성곽이다. 성리학적 이상 도시를 꿈꾸며 당대 최고의 건축 기술을 집약한 곳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하루에도 수만 명이 오가는 번화가 사이 수원화성(華城)의 팔달문(八達門) 바로 곁에 있는 도심 한복판에 팔달사(八達寺)가 자리하고 있다.

팔달사의 용화전(龍華殿)에는 건물 측면에 벽화가 있었는데 우측에는 넓은 포벽에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바로 좌측 외벽에 호랑이와 토끼의 벽화가 있었다. 20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계곡과 소나무 등의 산림이 배경이다. 화계사의 그림에 비해 호랑이의 자세는 몸을 곧추세워 앉아 있는 모습이다. 표정도 더 당당하고 여유롭다. 또한 토끼도 자세가 각이 서고 경직된 모습이다. 눈동자도 빨갛다. 장죽(담뱃대)은 화면을 압도한다. 길이가 화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정말 길기도 길었다.

용화전 좌측 벽화 팔달사 용화전 좌측에는 담배 피는 호랑이와 장죽을 시중 드는 토끼 벽화가 그려져 있다.
▲용화전 좌측 벽화 팔달사 용화전 좌측에는 담배 피는 호랑이와 장죽을 시중 드는 토끼 벽화가 그려져 있다. 정재학

담배 피우는 호랑이 몸을 곧추세워 앉아 토끼의 장죽 시중을 기다리는 호랑이의 표정이 당당하고 여유롭다.
▲담배 피우는 호랑이 몸을 곧추세워 앉아 토끼의 장죽 시중을 기다리는 호랑이의 표정이 당당하고 여유롭다. 정재학

장죽 시중 드는 토끼 호랑이에게 장죽을 시중 드는 토끼의 자세가 각이 서고 경직된 모습이고 눈동자도 빨갛다.
▲장죽 시중 드는 토끼 호랑이에게 장죽을 시중 드는 토끼의 자세가 각이 서고 경직된 모습이고 눈동자도 빨갛다. 정재학

화계사와 팔달사의 벽화에서 호랑이는 장죽을 기다리며 여유롭게 앉아 있는 동안, 토끼는 온몸을 굽혀 시중을 드는 지배를 당하는 모습이었다. 이를 그린 이름 없는 화공들은 이러한 불합리한 상황을 직접적인 저항 대신 풍자로 고발한 것으로 해석된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호시절은 지나갔다고들 한다. 문제는 '지나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지나갔느냐'일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교토삼굴의 시대가 온다. 세 개의 굴을 파두는 토끼의 지혜, 상황을 읽고 살아남는 유연함이 새로운 리더십으로 주목 받는다. 화계사 명부전 외벽의 달빛 아래에서, 수원 팔달사 용화전 벽의 낮 햇살 아래에서, 그 오래된 그림들은 지금도 말하고 있었다. 호랑이여, 담배만 피울 것이 아니라 토끼의 저 빨간 눈을 보라. 그 눈 속에 다음 시대가 들어 있다고.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서울 #화계사 #수원 #팔달사 #담배피는호랑이와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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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학예연구사이자 20여 년 동안 문화유산을 연구하고 탐방해 온 문화유산 전문 크리에이터입니다. 김구 선생 탄생150년을 맞아 문화강국 프로젝트 일환, 2036년 전주하계올림픽 유치 및 국립한국호랑이박물관 건립 기원을 위해 기획한 연재로 "거룩한 장도-한국호랑이를 찾아서" 매주 금요일,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한국호랑이를 찾아 탐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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