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죽 시중드는 토끼 호랑이에게 두손 모아 긴 대나무 담뱃대를 내밀어 시중드는 모습이 흥미롭다
정재학
벽화를 천천히 살펴보자. 배경은 휘영청 보름달이 뜬 밤 산중이다. 호랑이의 자세를 보라. 앞발을 세우고 앞으로 바짝 엎드린 자세다. 마치 엎드려 절받기식으로 표정 또한 비굴한 면이 없지 않다. 토끼는 두 마리다. 한 마리는 앞으로 엎드려 공손히 절을 하고 있고 또 한 마리는 두 손 모아 긴 대나무 담뱃대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다. 토끼가 호랑이에게 담배를 대접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이런 기막힌 도안이 생겨난 걸까. 이 그림의 유래로 충청도 황팔도(黃八道)의 전설이 거론된다. 국가유산청 자료에 따른 전설은 이렇다. '효자 아들 황팔도는 어머니의 병 때문에 개의 간이 필요했다. 밤마다 호랑이로 둔갑해 100개의 간을 꺼내 봉양하려 했지만, 99번째에 아내에게 발각된 것. 아내가 결국 둔갑을 위한 부적을 태워 황팔도는 호랑이로 전국 팔도를 떠돌다가 죽임을 당했다'는 전설이다.
해당 자료에 따르면 "(황팔도 전설이) 경기도 지역으로 전파되며 호랑이 모습의 황팔도가 친구나 아들이 준 담뱃대를 물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변이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어리석은 강자 호랑이를 당시 부패하고 무능했던 권력층, 강압과 흉포를 일삼았던 일본인에 비유"했다는 설명도 이어진다. 약자이지만 지혜가 있는 토끼는 조선 민중으로 비유해 위기를 모면하는 생존 전략을 보여줬다는 해석이다.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시대

▲수원화성 팔달문 수원화성 팔달문 근처에 팔달사가 자리하고 있다.
정재학
두 번째 목적지는 경기도 수원이었다. 지난 3일 방문했다. 수원화성은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원침(園寢)인 현륭원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1796년 완공한 성곽이다. 성리학적 이상 도시를 꿈꾸며 당대 최고의 건축 기술을 집약한 곳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하루에도 수만 명이 오가는 번화가 사이 수원화성(華城)의 팔달문(八達門) 바로 곁에 있는 도심 한복판에 팔달사(八達寺)가 자리하고 있다.
팔달사의 용화전(龍華殿)에는 건물 측면에 벽화가 있었는데 우측에는 넓은 포벽에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바로 좌측 외벽에 호랑이와 토끼의 벽화가 있었다. 20세기 전반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계곡과 소나무 등의 산림이 배경이다. 화계사의 그림에 비해 호랑이의 자세는 몸을 곧추세워 앉아 있는 모습이다. 표정도 더 당당하고 여유롭다. 또한 토끼도 자세가 각이 서고 경직된 모습이다. 눈동자도 빨갛다. 장죽(담뱃대)은 화면을 압도한다. 길이가 화면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정말 길기도 길었다.

▲용화전 좌측 벽화 팔달사 용화전 좌측에는 담배 피는 호랑이와 장죽을 시중 드는 토끼 벽화가 그려져 있다.
정재학

▲담배 피우는 호랑이 몸을 곧추세워 앉아 토끼의 장죽 시중을 기다리는 호랑이의 표정이 당당하고 여유롭다.
정재학

▲장죽 시중 드는 토끼 호랑이에게 장죽을 시중 드는 토끼의 자세가 각이 서고 경직된 모습이고 눈동자도 빨갛다.
정재학
화계사와 팔달사의 벽화에서 호랑이는 장죽을 기다리며 여유롭게 앉아 있는 동안, 토끼는 온몸을 굽혀 시중을 드는 지배를 당하는 모습이었다. 이를 그린 이름 없는 화공들은 이러한 불합리한 상황을 직접적인 저항 대신 풍자로 고발한 것으로 해석된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호시절은 지나갔다고들 한다. 문제는 '지나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지나갔느냐'일 것이다.
이제 바야흐로 교토삼굴의 시대가 온다. 세 개의 굴을 파두는 토끼의 지혜, 상황을 읽고 살아남는 유연함이 새로운 리더십으로 주목 받는다. 화계사 명부전 외벽의 달빛 아래에서, 수원 팔달사 용화전 벽의 낮 햇살 아래에서, 그 오래된 그림들은 지금도 말하고 있었다. 호랑이여, 담배만 피울 것이 아니라 토끼의 저 빨간 눈을 보라. 그 눈 속에 다음 시대가 들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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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학예연구사이자 20여 년 동안 문화유산을 연구하고 탐방해 온 문화유산 전문 크리에이터입니다. 김구 선생 탄생150년을 맞아 문화강국 프로젝트 일환, 2036년 전주하계올림픽 유치 및 국립한국호랑이박물관 건립 기원을 위해 기획한 연재로 "거룩한 장도-한국호랑이를 찾아서" 매주 금요일,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한국호랑이를 찾아 탐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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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기 전 벽화 속 토끼의 '빨간 눈'에서 읽어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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