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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시탈부터 장그래까지, 이 공원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부천시 송내역 인근 구지공원 산책길... 어릴 적 영웅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다

등록 2026.06.05 10:28수정 2026.06.05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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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햇볕은 따갑다. 갈수록 봄은 짧아지고 여름은 일찍 다가온다. 벌써 봄은 끝나고 초여름 날씨이다. 점심을 먹고 사무실 근처에 있는 '구지공원'으로 갔다.

나무 숲 아래 그늘은 시원하다. 햇살만 피하면 더없이 좋은 날이다. 푸른 하늘과 그 아래 초록의 나무, 또 그 밑의 붉고 노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여린 바람이 불어오고 그 속에 앉아 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할 일이 어디 있을까. 공원 숲 사이 좁은 길은 바람의 길이다. 호흡의 길이다. 이 길을 통하여 도시와 그 속의 생명은 숨을 쉬고 삶을 유지한다.


작아도 넉넉한 공원

애향비(송내역 앞) 송내역 앞에 있는 애향비입니다, 옛 구지리 마을 주민들이 건립한 것입니다.
▲애향비(송내역 앞) 송내역 앞에 있는 애향비입니다, 옛 구지리 마을 주민들이 건립한 것입니다. 오동희

구지공원은 경기 부천시 송내역 인근에 있는 작은 공원이다. '구지'는 부천시 송내와 상동 부근의 옛날 지명이라고 한다. 송내역 주변지역은 '구지리'라고 불렸는데, 1973년에 부천이 시로 승격 하면서 행정구역 명칭이 '송내동'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공원의 면적은 작아도, 그 넉넉함과 품은 어느 큰 공원에 못지 않다. 오히려 작은 공원이 주는 느긋함과 조용함 그리고 여유는 비할 바가 아니다.

공원 안은 도심의 다른 작은 공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천천히 조금만 걸어도 한 바퀴를 돌 수 있고, 군데군데 어린이를 위한 놀이시설과 쉴 수 있는 정자와 의자, 아담하게 꾸민 조경물들이 있다. 주민들의 쉼터가 되어주는 공원이다. 오히려 이 공원의 좋은 점은 공원 바깥에 있다. 도로와 공원 담장 사이에 큰 나무들이 담장을 따라 넓게 자리 잡고 있다. 나무 사이로 흙길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다. 한적한 숲속을 걷는 듯하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느리다. 뒷짐을 진 사람,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시는 어르신, 커피를 마시며 걸어가는 사람... 이곳에서의 움직임과 속도는 느려진다. 옆 도로에서는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이지만 담장 하나 사이에 다른 세상이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하지만 시간은 장소와 공간에 따라 상대적이다. 시간을 받아 들이는 것은 사람이다. 같은 시간이지만 공원 안은 밖과 다르게 정적과 느림으로 이어진다.

구지공원의 특별한 공간


숲속 만화로 종합안내판 숲속 만화로의 종합안내판입니다. 작품의 이름과 설치장소가 있습니다.
▲숲속 만화로 종합안내판 숲속 만화로의 종합안내판입니다. 작품의 이름과 설치장소가 있습니다. 오동희

공원 다른 편은 높은 나무들이 길 양쪽으로 도열한 가로수길이다. '숲속 만화로 길'이다. 이 공원만의 특별한 점이 여기에 있다. 숲속 만화로는 구지공원에서 상동초등학교까지 1.2km 산책로에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사랑을 받았던 만화 주인공들의 조형물 22점이 설치되어 있다. 1950년대 김성환의 <고바우영감>과 1970년대 고우영의 <일지매>, 1980년대 이상무의 <독고탁>과 1990년대 원수연의 <풀하우스>, 2000년대 김동화의 <빨간자전거> 등의 작품 속 주인공들을 감상할 수 있다.

멀리 뻗은 길의 아름다운 가로수 아래 잊힌 만화 속의 영웅들이 서 있다. 나무에 가려져 있어 그 앞에 가서야 얼굴을 드러낸다. 일지매와 각시탈, 라이파이가 늠름하게 서있다. <달려라 하니>의 주인공인 하니는 뛰어가고 '영심이'의 모습도 보인다. 어린 시절과 중고등학교를 함께 하였던 많은 만화 주인공들이 여기에 모여 있다. 만화를 보는 그 순간만은 함께 울고 웃으며 행복을 주었던 주인공들을 오랜 시간을 지나 마주한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고 가슴이 뛰게 한 만화들이다. 여기서는 잊힌 주인공들이 아니다. 여전히 우리들과 함께 있다.


<미생>의 장그래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다른 주인공들의 당당한 모습에 비하여 이 청년은 서류 가방을 든 채 헐레벌떡 뛰어가고 있다. '미생'이 바둑에서 아직 살지 못한 돌을 뜻하는 것처럼, 완전한 삶을 꿈꾸며 살아가지만 힘들기만 한 우리들이다. 가방을 들고 숨 가쁘게 뛰어가는 모습에서 죽지 않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버티며 견디는 직장인의 애환과 현대인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거울 속 나를 보는 것 같다. 당당하지 못한, 당당할 수 없는 우리 모습이다. 그래서 영웅적인 만화 주인공을 동경하고 빠져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릴 적 꿈과 동경의 대상이 이제는 삶에 지친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힘내라고, 다시 용기를 내라고.'

<미생> 장그래 숲속 만화로에서 만날 수 있는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입니다.
▲<미생> 장그래 숲속 만화로에서 만날 수 있는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입니다. 오동희

아이들에게는 낯선 주인공일 것이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이곳으로 와서 만화 주인공들의 활약상을 들려주는 것 만으로도 특별하고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다. 만화가 나왔을 때의 시대상까지 이야기 해준다면 세대 사이에 공감을 할 수 있고 교육도 될 것 같다. 이 길은 과거로 이어진 시간 여행 타임머신이다.

어디서 할머니들의 웃음소리가 담장을 넘어 온다. 길을 사이에 두고 공원 맞은편 아파트 경로당에서 들리는 소리이다. 무엇 때문에 즐거우신걸까. 활짝 열어 놓은 문으로 열 명이 넘는 할머니들이 점심 준비 하는 모습이 보인다. 큰 양푼이에 채소를 넣고 비빔밥을 만드시는 중이었다. 오래된 아파트에서 만날 수 있는 정겨운 모습이다.

영국의 경제학자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의 저서 제목이 떠올랐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작아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많은 것을 꽉 차게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작다는 것은 비좁고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알맞게 충분할 만큼 최소한'이라는 뜻이다. 나와 이웃에 맞춘, 지나치게 크지 않고 작은 정도를 말한다. 그곳에 살고있는 사람들과 이웃들이 일상에서 삶을 키우며 나누기에 맞는 크기라는 뜻이다. 도심의 작은 공원은 일상의 쉼이 되고 만남을 이어주는 곳이다. 일상은 '작고 소박한 것'이며 거기에 행복이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도심의 작은 공원은 가야 할 목적지가 아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웅장한 공원이라도 멀리 있다면 그곳은 여행지이지 일상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갈 뿐이지만 여기 작은 공원에서는 이웃이다. 자연스럽게 얼굴을 익히고 인사를 나누게 된다. 사람과 공간이 어우러지고 마을 공동체의 따뜻함은 이 작은 만남에서 시작된다. 작지만 가까이 있고 소박하지만 사람들의 삶을 위로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작은 공원은 소박한 방식의 아름다움이다.

가로수 아래 의자마다 커피를 든 직장인, 할머니와 어린아이, 아파트 주민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짧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사무실로 들어 가야지만 이 순간 만큼은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다. 짧은 행복을 두고 다시 긴 오후가 있을 사무실로 발길을 옮겼다. 느긋하게 걷기 좋은 길, 과거로 잠시 돌아갈 수 있는 길이어서 좋은 공원이다. 6월 어느 날의 아름다움은 도시의 작은 공간에서 숨 쉬고 있다.

[구지공원]

주소 :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상일로 101(상동)
조성 연도 : 1993년
대중 교통 : 지하철 1호선 송내역에서 걸어서 10분 내외
특징 : 도심 근린공원, 숲속 만화로 길, 화장실(2013년 아름다운 화장실 금상)
#공원 #작다 #만화 #아름답다 #송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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