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신문
모내기를 끝낸 논마다 가득 찬 물 위에는 아직 하늘이 반쯤 잠겨 있고, 사람들은 흙 속에 어린 모를 심어 두었지만, 어쩌면 그보다 먼저 심고 있는 것은 또 하나의 계절인지도 모른다. 바다를 건너온 바람은 비릿한 소금기와 젖은 흙냄새를 한데 품고 와 뺨을 스치고, 산기슭에서 밀려온 아카시아 향기는 그 위에 조용히 내려앉아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향기로 번역한다.
선창가를 스치는 바람은 포구를 지나 들녘으로 길게 흘러가고, 물결 위에 흔들리는 작은 배들과 어린 모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같은 계절을 견디며 서 있다. 돌이켜보면 삶도 계절과 닮아 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언제나 소리 없이 시작되고, 가장 깊은 성장은 대개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먼저 일어난다. 그래서 섬마을의 초여름 역시 자신이 초여름이라 말하지 않는다.
다만 아무도 모르게, 오래된 시간의 강을 건너듯 천천히 익어갈 뿐이다. 그렇게 논물 위에서 계절이 조금씩 자라나듯, 사람들의 선택 또한 어느새 마을 곳곳에서 익어가고 있었다.
유난히 전국을 들썩이게 했던 지방선거가 끝이 났다. 요란하게 좁은 골목길을 누비던 유세차도, 주민들의 귀에 못이 박이도록 같은 구절을 반복해 틀어대던 로고송도 어느새 썰물처럼 사라졌다. 푸르고 빨간 원색으로 펄럭이던 현수막들이 거두어진 자리에는 이제 쓸쓸한 저녁 바람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그렇게 폭풍 같던 선거가 지나간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득 오래전 이 땅을 채웠던 선거 풍경들이 아지랑이처럼 가물가물 피어오른다.
지금의 팔순, 구순 어르신들이 푸르른 청춘이던 시절의 선거는 지금보다 조금 더 소란스럽고, 동시에 조금 더 인간적이었다. 글자를 익히지 못한 유권자가 많았던 1940~50년대에는 누구나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투표소 안에 후보자의 상징 그림이나 막대기 기호가 그려지곤 했다.
사람들은 지금처럼 세련된 인쇄 용지 대신, 하얀 종이에 지지하는 후보의 칸을 찾아 붓두껍(도장)을 꾹 눌러 찍는 방식으로 한 표를 행사했다. 투표가 끝난 뒤에는 함을 열어 그 온기 어린 표들을 손으로 일일이 꺼내 세었으니, 어쩌면 그 시절의 민주주의는 지금보다 조금 더 느린 대신 사람 손의 온도를 더 닮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장날 읍내와 시장 골목, 마을 평상과 경로당 마루에서는 늦은 밤까지 투박하지만 진지한 정치 이야기가 이어지곤 했다.
시선을 조금만 넓혀 세상 곳곳의 빛바랜 선거사를 돌아보면, 도무지 믿기지 않는 웃지 못할 해프닝과 전설 같은 촌극들이 수없이 존재해 왔다. 그것들은 때로 인간이 만든 제도가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보여주었고, 동시에 정치라는 것이 결국 사람이 하는 일임을 증명해 왔다.
1872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대 최고의 언론인이자 야당 후보였던 호라이스 그리일리가 대선 투표 직후이자 최종 선거인단 투표가 완료되기 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비극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를 향했던 유권자들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었기에, 역사상 유일하게 이미 숨을 거둔 망자에게 수십 개의 선거인단 표가 그대로 쏟아지는 기묘한 일이 기록되었다.
선거란 본래 완전하지 않은 인간이 고안해내고 인간이 행하는 일이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조금은 서툰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다. 아무리 세련된 법과 제도를 만들어 놓아도, 그것을 채우는 것은 결국 살아 숨 쉬는 유권자들의 가슴속 감정이기 때문이다.
세월은 흘렀고, 선거 제도는 점점 복잡해졌다.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마주한 풍경 역시 그러했다. 기초의원을 뽑는 선거구에서는 중선거구제 특유의 풍경이 펼쳐졌다. 똑같은 색깔의 점퍼를 입은 같은 정당의 후보들이, 로고송에 맞춰 춤을 추며 이름과 기호만 조금씩 다른 채로 자신을 뽑아 달라고 유세했다. 그들은 각각 '1-가', '1-나', '1-다', '1-라'와 같은 번호와 이름이 새겨진 선거복을 입고 거리에 서 있었다.
사실 같은 정당에서 여러 명의 후보가 함께 출마하는 일이 아주 새로운 제도는 아니지만, 나날이 복잡해지는 선거 환경 속에서 주민들에게는 여전히 낯설고 혼란스러운 풍경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골목길에서는 같은 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서로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손을 흔들었고, 시장통에서는 "어느 분이 누구였더라" 하는 말들이 반복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혼란은 결코 무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오랫동안 투표라는 권리를 성실하게 행사해온 사람들이기에 더 오래 고민하고, 더 깊이 들여다보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투표용지 한 장을 손에 쥐고 밤새 뜸을 들이며 고민하는 유권자들의 마음은, 명절날 찾아온 두 손주 가운데 누구에게 먼저 세뱃돈을 쥐여 주어야 할지 고민하는 할머니의 애틋한 마음과도 닮아 있었다.
선거라는 것은 참 묘하다. 가끔은 세상에서 가장 진지해서 웃음이 나고, 가끔은 너무 우스워 보여 오히려 더 진지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 모든 복잡함 속에서도 투표 날 아침이 밝자 주민들은 어김없이 집을 나섰다.
새벽 일찍 바다에 나갔다 돌아온 젊은 선장도 있었고, 하루 종일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며 가두리 양식장을 둘러보고는 작업복 그대로 투표소를 찾은 이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활기찬 걸음 사이로, 굽은 허리로 지팡이에 의지해 느릿느릿 걸어가던 어르신들의 뒷모습까지 함께 포개질 때, 그 투표소에는 이 나라가 지나온 긴 시간이 묵직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개표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오늘, 지면 위로 선거 결과가 차분한 활자가 되어 내려앉는다. 누군가는 기쁨을 얻었고, 누군가는 아쉬움을 남겼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와 상관없이, 그날 도장을 꾹 눌러 찍었던 주민들의 손끝이 향한 곳은 단순한 이름 석 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좁은 사각형 안에는 당신들이 평생을 살아낸 시간이 있었고, 거친 파도 속에서도 버텨낸 삶이 있었으며, 자식들과 손주들이 살아갈 내일을 향한 오래된 염원이 함께 담겨 있었다.
사실 군민들에게 정치는 TV 속 구호보다 조금 더 생활 가까이에 있다. 비가 많이 오면 무너지는 농로가 언제 보수될지, 겨울 바람 부는 날 읍내 병원에 다녀오려면 버스를 몇 번 갈아타야 하는지, 여객선이 끊기면 하루 생계가 어떻게 흔들리는지, 어판장 가격이 떨어진 날 저녁 식탁 위의 한숨이 얼마나 길어지는지. 삶은 늘 그렇게 아주 구체적인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선거철이 되면 후보들은 마을회관을 돌고, 포구를 찾고, 시장 골목을 걸으며 수많은 약속을 남긴다. 그러나 선거가 끝난 뒤에도 군민들이 다시 마주하는 것은 여전히 새벽 바다에 나가야 하는 하루이고, 허리를 굽혀 밭을 매야 하는 계절이며, 병원과 학교와 버스 시간표를 걱정해야 하는 오래된 일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로 묻는다. 정치가 정말 우리 곁에 와 있는가, 혹은 우리가 아직도 정치를 향해 먼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인가를. 그럼에도 사람들은 또 투표소로 간다. 왜냐하면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끝내 기대하는 일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치열했던 섬마을의 축제는 이제 완전히 끝이 났다. 다시 찾아온 부둣가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범하고 고요한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어간다.
여전히 때가 되면 거친 고동 소리를 내며 여객선이 드나들고, 넓은 마당 가득 까맣고 꼬들꼬들하게 다시마를 말리는 어민들의 손길이 바쁘다. 소란스러웠던 유세차들이 떠나간 도로 위에도, 마지막 저녁 배가 물살을 가르며 들어오는 자그마한 포구에도 다시 오래된 일상의 무게가 차곡차곡 쌓여 간다. 섬마을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새벽 바다를 맞이할 것이다.
김미협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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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의 정치가 떠난 자리에 남은 거친 손과 새벽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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