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사발을 엎어 하나의 무한한 원을 만들다"

[인터뷰] 자신만의 달항아리 세계 구축해 온 강신봉 작가

등록 2026.06.05 11:56수정 2026.06.05 11:56
0
원고료로 응원
밤하늘의 풍성한 보름달을 닮아 넉넉하고 푸근한 멋을 자랑하는 달항아리는 본래 조선 숙종 후반(17세기 후반)에 태어나 영조 전반(18세기 전반)에 전성기를 누린 뒤 100년 만에 사라졌던 '백자대호(白磁大壺)'다. '달항아리'라는 다정한 이름은 20세기 미술사학자 고유섭과 화가 김환기가 그 형태에 매료되어 붙이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각인되었다.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에 위치한 공방 '소우재(素愚齋)'의 강신봉 작가는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오직 흙과 불, 그리고 사유를 이어가며 자신만의 달항아리 세계를 구축해 왔다. 1986년 여주 도예 명장 1호인 조병호 명장을 사사하며 도예에 입문한 그는, 1996년 '바탕이 어리석은 집'이라는 뜻의 공방을 열고 기교에 기대지 않는 우직한 태도로 작업에 몰두해 왔다. 지난 2일 그를 만났다.


 경기 여주시 북내면 '소우재' 공방에서 달항아리에 대해 설명하는 강신봉 도예가
▲ 경기 여주시 북내면 '소우재' 공방에서 달항아리에 대해 설명하는 강신봉 도예가 이장호

둘이 만나 하나 되는 여정

강 작가가 조선 전통의 '업다지' 방식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지난 2000년, 여주 오금리에서 전통 도자 복원에 힘쓰던 문종국 선생 등과의 인연이 계기였다. 지름 40cm 이상의 달항아리는 점성이 낮은 흙을 사용하여 한 번에 올리기 어렵기 때문에, 상부와 하부를 따로 빚은 뒤 이어 붙이는 독창적인 접합 기법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일반적인 도자 작업과 달리 그의 달항아리는 형태를 잡는 성형에만 최소 4일이 걸린다고 한다. 하루 동안 상·하부를 성형하면 다음 날은 그대로 자연 건조를 시킨다. 셋째 날 상태를 보며 살짝 불을 대어 가볍게 말린 뒤, 넷째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둘을 하나로 붙인다. 원료를 고르고 준비하는 전 단계까지 합치면 항아리 하나가 가마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도합 20일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는 지난한 작업이다.

"지상으로 내려온 달이 고즈넉합니다. 달항아리는 두 개의 사발을 엎어 붙여서 하나의 무한한 원을 만든 것입니다. 본디 둘인 것이 하나가 되는 과정이지요."

혹독한 확률을 뚫고 피어나는 불완전한 미학


 점토 비율이 적은 대신 여주 지역의 다른 흙이나 규석 등이 섞어 백자같지 않은 백자 달항아리도 태어난다.
▲ 점토 비율이 적은 대신 여주 지역의 다른 흙이나 규석 등이 섞어 백자같지 않은 백자 달항아리도 태어난다. 이장호

이 접합 과정과 1300도가 넘는 가마 안의 번조(굽기) 단계를 거치며 달항아리는 필연적으로 미묘한 뒤틀림을 겪고 중심선이 어긋난다. 강 작가는 이 흐트러짐을 '불완전한 미학'이라 부르며 있는 그대로 포용한다. 완벽하지 않기에 오히려 인간적인 따스함과 깊이가 우러난다는 철학이다. 이 미학을 구현하기 위해 강 작가는 상상을 초월하는 까다로움을 견뎌낸다. 그가 사용하는 특수 배합토는 규석 성분이 강하고 점토 성분은 5% 미만이다. 이 흙을 제어하는 데만 10년이 걸렸고, 지독한 신경통을 앓기도 했다고 한다.

가마에서 한 번에 20점 정도를 구워내면 세상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작품은 딱 한 점 나올까 말까다. 첫 정식 개인전이었던 2008년 포항 포스코갤러리 초대전 때부터 지금까지 늘 그래왔다고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나머지 19점은 미련 없이 파기하여 공방 화장실 바닥과 벽을 다 메웠을 만큼, '19 대 1'의 확률을 뚫어야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탄생했다.


살아 숨 쉬는 '다중적인 얼굴'

 강신봉 작가의 달항아리 '업다지'로 붙인 탓에 비대칭의 자연스러움이 살아 있다.
▲ 강신봉 작가의 달항아리 '업다지'로 붙인 탓에 비대칭의 자연스러움이 살아 있다. 이장호

강 작가는 최근 현대식 가마의 지나치게 일정한 온도 제어 방식을 경계한다. 불이 어느 순간 확 올라가며 기물에 불완전한 변화를 주어야 도자기에 힘이 생기는데, 요즘 일부 가마들은 온도를 너무 길게 끌며 곱게만 구워내 작품이 고착화된다는 생각이다.

그는 오히려 가마 안에서 불길이 요동치며 만들어내는 뜻밖의 뒤틀림과 거친 변화를 사랑한다. 그가 추구하는 백자의 미학은 '다중적인 얼굴'에 있다. 보는 각도와 빛에 따라 어두운 것 같으면서도 맑은 면이 드러나고, 투박한 듯하면서도 세련된 멋이 공존하는 도자다. 은은한 빛깔 역시 강렬함 대신 눈이 편안해질 정도로 엷고 청아한 청백색을 띤다.

"빛깔도 그렇습니다. 나는 아주 쨍한 백색보다는 약간 빛이 바랜 듯한 '물 빠진 색'을 좋아합니다. 세상을 향해 강하게 자기주장을 하기보다, 한 걸음 뒤로 살짝 물러나 있는 빛깔이지요. 그러나 결코 죽어 있는 색은 아닙니다. 잔잔하게 숨 쉬며 주변을 포용하는 온기가 있지요."

전통의 완벽한 복제를 넘어 순백의 항아리에 철분을 더하는 등 자신만의 예술적 사유를 흙에 심어내는 강신봉 작가. 과거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미감을 담아내야 살아있는 작품이 된다고 믿는 그의 달항아리는, 오늘도 세상을 비추는 은은한 달빛처럼 따스한 온기를 머금어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여주신문에도 실립니다.
#강신봉 #소우재 #달항아리 #도자기 #여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경기도 여주에서 지역신문 일을 하는 시골기자 입니다. 지역의 사람과 역사, 문화에 대해 탐구하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여주시사 편찬위원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한국 아파트가 무너지기 쉬운 이유... 충격적인 국토부 문서 한국 아파트가 무너지기 쉬운 이유... 충격적인 국토부 문서
  2. 2 '유해진 북한상'이 표현의 자유라면 1923년 '조센징상'은? '유해진 북한상'이 표현의 자유라면 1923년 '조센징상'은?
  3. 3 이 대통령님, '대국민 사기극'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대통령님, '대국민 사기극'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4. 4 금메달 들고 웃으며 "군대 안 간다"는 선수들 욕하기 전에 금메달 들고 웃으며 "군대 안 간다"는 선수들 욕하기 전에
  5. 5 조희대, 오마카세 논란에 "못 먹어본 음식 먹어보고 싶다는 게..." 조희대, 오마카세 논란에 "못 먹어본 음식 먹어보고 싶다는 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