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기 몫의 바다를 건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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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로 일하던 시절, 나는 늘 교실 뒤편의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쉬는 시간에도 혼자이고, 점심도 혼자 먹고, 종일 친구와 한마디도 나누지 않는 아이들. 예전에도 그런 아이들은 있었다. 하지만 퇴직할 무렵에는 한 학급에 한두 명이 아니라 두세 명으로 늘어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혼자가 편한 아이도 있었지만,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면서도 이미 형성된 무리에 들어가지 못해 멀찍이 서 있던 아이들도 있었다. 교사로서 안타까웠지만 뚜렷한 해결책은 없었다.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다고 해서 친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가끔 그 아이들을 떠올린다. 그 아이들의 고독은 성적표에 기록되지 않았다. 산티아고의 84일도 마찬가지다.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은 그렇게 쉽게 보이지 않게 된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경쟁을 배운다. 남보다 앞서야 하고,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뒤처지지 말아야 한다고 배운다. 학교도 사회도 점점 효율을 중시한다. 효율은 중요하다. 하지만 효율은 종종 사람을 숫자로 만든다. 성적이 좋은가, 실적이 좋은가, 성과가 있는가. 그 기준으로만 사람을 평가하기 시작하면, 관계와 고독 같은 문제는 쉽게 뒷전으로 밀려난다. 시험 성적표에는 나타나지 않는, 교실 뒤편 아이들의 외로움처럼 말이다.
산티아고가 보여 주는 삶은 효율의 논리와는 거리가 멀다. 84일 동안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어부는 효율만 따진다면 이미 실패한 사람이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그 노인을 실패자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자신의 바다를 건너는 사람'으로 그린다.
노인에게 바다는 적이 아니다. 청새치도 적이 아니다. 그것들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이다. 그래서 그의 싸움은, 사실 싸움이라기보다 만남에 가깝다. 자기보다 큰 존재와의 만남, 그리고 그 만남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노인은 거대한 물고기를 상어들에게 거의 다 빼앗긴 채 돌아온다. 겉으로만 보면 실패다. 청소년기에 이 책을 읽을 때 나도 그렇게 읽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그가 가져온 물고기의 뼈대는 실패의 증거가 아니다. 그 만남이 실제로 있었다는 증거다. 그는 끝내 자신의 큰 물고기와 만났고, 자기 몫의 바다를 건너왔다.
퇴직 후의 시간 속에서, 교실 뒤편 아이들을 떠올리며 나는 종종 생각한다. 세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얻었는지 묻는다. 얼마를 벌었는지, 얼마나 성공했는지, 얼마나 효율적으로 살았는지 묻는다.
그러나《노인과 바다》는 다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무엇을 획득했는가?"가 아니라, "당신은 어떤 바다를 건너왔는가?"라고.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기 몫의 바다가 있다. 그것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바다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만나기 위해 건너야 하는 공간이다. 효율과 성과가 삶의 기준이 되어 가는 시대일수록, 나는 산티아고의 그 한마디를 더 자주 떠올리게 된다.
"My big fish must be somewhere.(나의 큰 물고기는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획득이 아니라, 끝까지 자기 몫의 바다를 건너, 결국 자기 자신과 마주하겠다는 그 믿음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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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얻게 된 자유로운 시간을 일상의 변화를 통해 새롭게 조각해 가는 초보 은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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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후 나를 멈칫하게 한 헤밍웨이의 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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