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표지
인디고(글담)
저자는 영화 <월터의 상상이 현실이 된다>를 통해 진짜 '삶의 정수'가 무엇인지 묻는다. 시사 잡지 <라이프>의 평범한 필름 관리자 월터는 사라진 마지막 표지 사진인 '25번 필름'을 찾아 전 세계를 헤매지만, 마침내 베일을 벗은 표지 사진은 역사적 영웅이나 거창한 사건이 아니었다. 회사 앞 벤치에 걸터앉아 묵묵히 필름을 들여다보고 있는, 빛 한 점 들지 않는 암실에서 평생을 바쳐온 월터 자신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가슴이 먹먹 해지는 대목이었다. 숀이 말한 삶의 정수란 에베레스트 꼭대기 같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삶의 한가운데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특별하지 않은 날들을 보내는 평범한 이들의 모든 순간 그 자체였다. 어느 한 분야에서 소리 없이 자기 소명을 다해온 모든 이들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예술이자 최고의 작품인 셈이다.
이렇듯 나의 자리를 지키며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결국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일과 같다. "내가 왜 이 글을 쓰고 있지?"라며 권태로움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순간조차도, 실은 내 마음을 살피며 '나만의 작품'을 완성해가는 소중한 과정인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나 역시 슬그머니 용기 모자를 써본다. 이왕 나선 길,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용기가 샘솟는다.
인생 전체는 미니멀하게, 취향은 맥시멀하게
"이게 정말로 내 삶에 가치가 있는 물건일지 생각하죠."
책을 읽으며 내가 실현하고 싶은 삶의 형태를 명확히 마주했다. 생활은 미니멀하게 줄여 가진 물건들을 단출하게 만들고 싶다. 언제든 떠나고 싶을 때 작은 트럭 하나에 짐을 싣고 훌쩍 떠날 수 있는 가벼움. 반면 다양한 경험과 깊은 사유를 받아들이는 취향 만큼은 맥시멀하게 채워 넣고 싶다. 그리하여 내 남은 인생이 조금 더 폭넓고 심도 있기를 기대해본다.
우리는 흔히 '진짜 하고 싶은 일'이 지금 여기가 아닌 먼 곳, 예컨대 파리 같은 낯선 도시에 있을 거라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진짜 가치는 내가 선택한 지금의 일상, 그 자잘한 행복을 발견하는 데 있지 않을까.
현직에 있을 때는 늘 다정하면서도 명확하고 따뜻한 사람이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니 어쨌든 타인에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일터를 떠난 지금은 특별히 듣고 싶은 거창한 말도, 나를 과하게 주장하고 싶은 욕심도 없다. 그저 하루하루 달라지는 손주들의 모습을 보며 "저 아이는 지금 무엇 때문에 속상할까" 마음을 헤아려보는 이 고요한 시간이 편안하고 좋을 뿐이다. 좋은 엄마, 훌륭한 장모, 멋진 할머니라는 타이틀에 얽매이지 않고, 그저 나답게 흘러가는 삶으로 족하다.
단 하나의 소중한 기억을 품고 산다는 것
책은 영화 <원더풀 라이프>를 빌려 묻는다.
"죽기 전에 단 하나의 기억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가져가겠는가?"
'단 하나의 기억'이란 문장 앞에서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귀하게 찾아온 첫딸을 임신했을 때의 일이다. 당장 수술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에 울다 지쳐 다시 찾은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아이가 무사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아이를 지켜냈다는 안도감과 온몸을 감싸던 환희.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이었다.
뒤이어 오래전 기억의 습작들도 줄지어 불을 밝힌다. 초등학교 시절, 제사에 쓸 곶감을 몰래 훔쳐 먹고 모른 척 시치미를 떼던 철부지 막내딸. 내 잘못 때문에 애먼 막내오빠가 엄마에게 호된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끝까지 나를 발고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내 주었던 기억.
"오빠, 그때 자백하지 않아서 미안했고, 끝까지 나를 지켜줘서 고마웠어." 그곳에서도 여전히 그리 살고 계시냐고, 이제는 먼 길을 떠난 오빠에게 마음으로 나직이 안부를 물어본다. 그러고 보니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의 대사처럼, 나의 아버지는 젊은 날 무엇이 되고 싶으셨을까, 한 번도 여쭈어보지 못했다는 뒤늦은 아쉬움도 밀려온다.
우리 삶은 이미 저마다의 영화다
이미화 작가는 매일 뭔가를 하지만 성과로 이어지지 않을 때, 두 발을 땅에 딱 붙이고 살고 싶어서 지금, 현재의 기록을 붙잡았다고 했다.
인생의 길을 실수 없이 찾아야 한다는 조급함에 쫓기는 이들이 있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꼭 대단한 스크린 속에 살지 않더라도 괜찮다. 서툴고 초라한 일상일지라도 매일 조금씩 씩씩하게 걸어가고 있다면, 그리고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우리 삶은 이미 그 자체로 가장 아름다운 한 편의 영화다. 오늘도 나는 나만의 영화 속에서 천천히 엔딩 크레딧을 향해 걸어간다. 단출한 배낭 하나를 메고, 맥시멀한 취향을 품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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