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고.
차유진
그러나 험한 능선 하나를 넘고 나니 풍경이 달라졌다. 책은 우리가 막연히 따뜻한 마음 정도로 여겼던 '다정함'이 사실은 인류의 진화를 이끈 힘이며, 협력과 공존을 가능하게 한 핵심 능력이었음을 차근차근 보여주기 시작했다.
저자 브라이언 헤어는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적자생존'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그에 따르면 적자는 흔히 생각하듯 강한 자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존재를 뜻한다. 그리고 인간의 진화사를 살펴보면 살아남은 종은 가장 강한 종이 아니라 가장 협력적인 종이었다.
"우리 종(호모 사피엔스)이 그 어떤 종보다도 번영할 수 있게 해준 힘은 친화력이다"(p.12)라는 문장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이자, 다정함을 바라보는 오래된 편견을 뒤집는 선언처럼 다가온다.
특히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자기가축화(Self-Domestication)'라는 개념이다. 개는 인간이 길들인 동물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기보다 가까이 다가간 친화적인 늑대들이 스스로 선택한 진화의 결과라는 것이다. 공격성보다 친화력을 선택한 늑대는 오늘날 수억 마리의 개로 번성했고, 야생 늑대는 멸종 위기에 놓여 있다. 살아남은 것은 가장 사나운 늑대가 아니라 가장 붙임성 있는 늑대였다.
보노보와 침팬지의 비교도 인상 깊었다. 침팬지가 경쟁과 위계를 중심으로 살아간다면, 보노보는 낯선 개체와도 음식을 나누고 협력한다. "친화력은 승리의 전략"(p.97)이라는 문장이 설득력을 얻는 순간이었다. 정다은 배우는 이 대목을 읽으며 "보노보가 다정할 수 있었던 이유가 환경의 영향도 컸다면, 인간의 다정함 또한 환경에서 비롯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책은 명쾌한 답을 내놓기보다, '인간의 다정함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스스로 묻게 만든다.
배우로서 가장 깊게 다가온 개념은 '마음이론'이었다. 타인의 마음을 추론하고 이해하는 능력이다. "감정은 우리의 생각에 있으며 대개는 타인의 생각에 대한 나의 추측과 추론에서 만들어진 것이다"(p.42)라는 문장은 타인과 관계 맺는 과정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했다. 우리는 늘 타인의 마음을 상상하며 살아간다. 인물을 이해하고, 상대 배우의 감정을 읽고, 관객의 마음에 닿기 위해 애쓴다. 허연주 배우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라고 말했다. 결국 연기는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저자 브라이언 헤어는 다정함의 밝은 면만 예찬하지 않는다. 인간은 가장 관용적인 동시에 가장 무자비한 종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자신의 집단에는 친절하지만 외부 집단은 쉽게 비인간화한다. "우리는 집단 정체성을 토대로 타인을 판단한다"(p.187)는 문장은 오늘날의 사회를 돌아보게 만든다. 내 편에게 향하는 다정함이 다른 편에게는 공격성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인간화의 해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접촉'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전쟁 중 유대인을 구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전쟁 이전에 유대인 친구나 이웃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서로 다른 집단이 만나고 관계를 맺을수록 두려움은 줄고 이해는 커진다. 이번 독서 토론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문장도 이와 연결된다.
"혐오는 학습되는 것임이 분명하며, 학습을 통해서 누군가를 혐오한다면 타인을 사랑하도록 배울 수도 있다. 사랑이 그 반대보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더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p.250)
정다은 배우는 이 문장을 읽으며 성선설과 성악설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었다고 했다. 인간은 원래 선한 존재일까, 아니면 선해지기 위해 배워야 하는 존재일까. 단정할 수는 없지만, 배우라는 직업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늘 새로운 인물의 삶을 들여다본다. 악인이라 불리는 인물조차 그의 상처와 사연을 찾으려 한다. 어쩌면 연기란 타인을 비인간화하지 않기 위한 훈련인지도 모르겠다.
비인간화 하지 않기 위한 훈련

▲ 이번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독서 토론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문장.
정다은
서구슬 배우는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드는 책이었다며 "혼자 뛰어난 사람보다 함께 좋은 장면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더 오래 기억된다"는 점에서 연기와도 닮아 있다고 했다. 연기는 혼자 완성되는 예술이 아니다. 상대 배우와 호흡하고, 스태프와 협력하고, 관객과 감정을 나눌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연신 배우가 가장 좋아한 문장 역시 오래 남는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함을." (p.300)
최선한 배우는 책 말미에 등장하는 '우자생존(優者生存)'이라는 표현을 소개했다. 적자생존이 아니라 우자생존. 여기서 '우(優)'는 우월함보다 넉넉함에 가깝다. 흥미롭게도 이 글자는 배우(俳優)의 '우'이기도 한데, 본래 예술인을 뜻하던 말에서 후대에 넉넉하다, 뛰어나다는 의미가 더해졌다고 한다. 강함보다 포용과 여유가 살아남는다는 표현은 책의 마지막 메시지를 더욱 선명하게 남겼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진화에 관한 책이지만, 결국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배우에게는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 다시 일깨워 준 책이기도 했다.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은 힘이 아니라 관계였고,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었다. 결국 살아남은 것은 가장 강한 존재가 아니라 가장 많이 이해하고, 가장 깊이 공감하며, 가장 기꺼이 손을 내민 존재였다.
드디어 다음 독서토론 도서 선정 순서가 내게 돌아왔다. 오랜 고민 끝에 선택한 책은 <사후생 - 죽음 이후의 삶 이야기>다. <사후생>은 죽음의 문턱을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삶의 본질을 다시 묻는 책이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가 인간이 어떻게 함께 살아남아 왔는지 탐구했다면, <사후생>은 삶의 끝이라고 여겨온 죽음 너머를 응시한다.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자 다행히 흥미로운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우리는 또 하나의 책을 품고 다음 항해를 이어간다.
독서 토론일 : 2026년 6월 4일
선정 도서 :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선정자 : 허연주
참석자 : 차유진, 정다은, 최선한, 이연신, 허연주, 서구슬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더 다정한 새해 프로젝트 리커버) - 친화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인류의 진화에 관하여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 (지은이), 이민아 (옮긴이), 박한선 (감수),
디플롯,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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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은 배우이며, 끄적끄적 글쓰는 취미를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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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만 보고 쉽게 생각했는데... 배우들이 혀 내두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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