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머신 위로 배달된 휴지 두 장의 정체...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

밴쿠버 피트니스 센터에서 만난 한국인 할아버지, 그 다정한 오지랖이 남긴 잔잔한 위로

등록 2026.06.11 14:34수정 2026.06.12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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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란히 커뮤니티 센터 피트니스에 들어섰다. 캐나다 이민자의 일상은 치열하면서도 때로는 단조로울 때가 많다. 이곳에 거주하는 수많은 한국인 중에는 간혹 공동장소에서 같은 한국인끼리 마주치는 것을 조심스러워하거나 심지어 꺼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타향살이가 주는 묘한 경계심이 자연스럽게 생겨난 탓이라 생각이 든다. 우리 부부 역시 주변 한국인들과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살아가고 있다. 오늘도 아내와 함께 피트니스를 찾아 평소처럼 러닝머신 위에 올라 바삐 발을 굴리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러닝머신 위에서 뛰면서 비지땀을 흘렸다.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을 손으로 연신 닦아가며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달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8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한국인 할아버지 한 분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셨다. 그러고는 정성스럽게 접은 갈색 종이 휴지를 아내와 내 계기판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으셨다. 우리 부부를 향해 "보기 좋습니다, 필요할 것 같아서 가져왔다"라는 다정한 한마디를 남기신 채, 할아버지는 조용히 돌아서 가셨다.


할아버지의 뜻밖의 행동에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움이 밀려왔다. 타인의 개인 공간과 영역을 철저히 존중하는 서구식 개인주의 문화에 익숙해진 탓일까.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가 운동 중인 부부에게 휴지까지 챙겨다 줄 만큼 주변 상황이 밀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러닝머신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 뛰고 걸으면서 내내 머릿속에서 생각이 깊어졌다. 혹시 같은 동포라는 애틋한 마음이 할아버지의 발걸음을 움직이게 한 것일까. 타향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모국인들에게 그저 작은 선행 하나를 베풀고 싶으셨던 노인의 깊은 속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할아버지가 러닝머신에 올려놓고 가신 휴지
할아버지가 러닝머신에 올려놓고 가신 휴지 김종섭

러닝머신을 끝내고 고마움이라도 전하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할아버지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기구에서 내려와 오늘도 여지없이 피트니스 내부를 감싸고 있는 원형 복도 모양의 걷기 트랙으로 향했다. 자동차 도로처럼 두 줄로 구획선이 나누어져 한쪽은 걷고, 다른 한쪽은 뛰도록 분류된 곳이었다. 트랙 입구에 들어서 걷고 있는데, 반대 방향으로 걸어오던 누군가가 내게 걷는 방향이 틀리다고 조용히 지적을 해주셨다. 바로 아까 그 휴지를 가져다주셨던 할아버지였다.

이곳 트랙은 요일마다 걷는 방향이 바뀐다. 화요일에는 시계 방향, 그다음 날인 수요일에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걸어야 한다. 나는 오늘이 화요일인 줄 착각하고 당당하게 역주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망한 마음에 "오늘 화요일이 아닌가요?" 하고 여쭈니, 할아버지는 오늘이 수요일이라고 알려주셨다. 온전히 요일마저 잊고 사는 꼴이 되어 왠지 할아버지에게 민망한 생각이 들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할아버지는 "건강하게 운동하니 참 좋아 보여요. 특히 아내는 더 건강해 보여서 보기 좋습니다"라는 말씀만 남기신 채 계속해서 트랙을 돌고 계셨다. 끝내 "할아버지 왜 저희에게 땀 닦으라고 휴지까지 가져다주신 거예요?"라고 물어보지는 못했다. 왠지 그 이유를 따져 묻는 것 자체가 노인의 순수한 호의에 결례가 될 것 같았다. 그저 대가 없이 베풀고 싶었던 할아버지의 마음에 온전한 자유를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늘 할아버지가 보여주신 것은 정성스레 접힌 휴지 두 장이라는 작은 행동이었지만, 그 행동을 이끌어낸 마음은 어느새 거대한 감동이 되어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한국도 아닌, 여러 인종이 뒤섞여 운동하는 공용의 장소에서 휴지 한 장으로 얼어붙었던 인간에 대한 따뜻함이 눈 녹듯 녹아내리는 순간이었다. 러닝머신 위에 덩그러니 놓인 갈색 휴지를 바라본다. 나 또한 세월이 흘러 저 노인의 나이가 되었을 때 누군가의 메마른 이민 생활을 적셔줄 수 있을까. 할아버지가 두고 간 따뜻한 정이 가슴속에 오래도록 잔잔한 울림으로 머문다.
#이민생활 #러닝머신휴지 #동포애 #인생의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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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 거주하며, 이민자의 삶과 일상에서 건져 올린 이야기를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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