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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2 이후로 처음...아빠가 팔순 여행에서 딸에게 주문한 것

제주도 이후 처음 함께 한 담양 여행... 아빠의 가장 눈부셨던 시절을 기억하며

등록 2026.06.16 14:53수정 2026.06.16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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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둣빛 댓잎들이 햇빛을 반사하며 눈부시게 반짝거리던 지난 5월 말 담양 죽녹원 숲길. 40일이면 15미터나 자랄 수 있는 성장세를 자랑하는 대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려 솨- 소리를 낸다. 그 사이로 구부정한 아빠의 등이 보인다.

평생 조경일을 하며 산으로 들로 부지런히 발을 디뎠을 아빠의 하체도 팔순이 되니 눈에 띄게 가늘어지고 힘이 빠졌다. 바지가 남아 펄럭거리는 두 허벅지를 힘들게 끌며 지팡이에 의지해 걷는 모습이 낯설다. 이상하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는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와, 여기 예쁘다! 아빠! 엄마랑 둘이 여기 서 봐. 사진 찍어 줄게!"

아빠와 엄마는 어색하게 길 가운데에 선다. 아빠는 나를 낳아 준 엄마를 48세에 먼저 보내고 오랫동안 혼자 계시다가 지금의 새엄마를 62세에 만나셨다. 그 후로 두 분이 같이 한 세월이 20년이 가까워 오는데도 여전히 카메라 앞에서는 어색해 하신다.

"좀, 웃어봐! 표정이 너무 어두워!"

아빠의 얼굴이 더 어색해진다. 웃는 것도 아닌 것이, 화난 것도 아닌 것이. 엄마라도 활짝 웃어 다행이다.

아빠의 팔순 기념 여행


손자와 외할아버지. 옛날 거리를 재현한 담양의 관광지에서 중학생 손자가 외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촬영하고 있다.
▲손자와 외할아버지. 옛날 거리를 재현한 담양의 관광지에서 중학생 손자가 외할아버지의 뒷모습을 촬영하고 있다. 김윤미

내가 지금 우리 아들 나이였던 중학교 2학년 때 기억 속 아빠는 호탕하게 잘 웃던 쾌남이었다. "아빠, 어떻게 하지, 나 영화관에 책가방을 놔두고 왔어"라고 겨우 털어놓는 딸에게 공부는 안하고 영화를 보러 다녔냐고 혼내지 않았다. 오히려 "우와 우리 딸 대단하네, 학생이 가방을 영화관에 놔둬버리다니"라며 껄껄 웃고는, 내 손을 꼭 잡고 영화관까지 버스를 타고 같이 가서 가방을 찾아주셨다. 그런 아빠가 이제는 다리가 불편해 조금만 걸어도 자꾸 어디에 걸터앉으려 하고, 소화 기능이 떨어져 비싼 음식을 사드려도 몇 숟갈 못 드시는 짠한 노인이 되었다.

아빠의 팔순을 축하해야 한다며 나는 나와 남편이 부모님과 남동생 가족의 여행 비용을 모두 감당하는 조건으로 해외 가족 여행을 제안했다. 아빠의 조경 지식과 두 노인의 체력을 감안하여 일본 교토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엄마가 싫다고 한다. 20년을 같이 사셔도 두 분이 이렇게 안 맞다. 아직도 익산의 한 식물원에서 일하는 아빠와 맞벌이인 우리 부부, 남동생 부부네와 다 같이 겨우 맞춘 일정이 최근 2박 3일 담양 여행이었다.


세 식구가 대형 펜션을 빌려 다 같이 머무는 것도 좋았겠지만, 아빠의 수면 패턴 문제와 남동생네 아이들이 초등학생인 걸 감안해 방은 따로 쓰되 이웃해 있는 빌라형 펜션을 숙소로 잡았다. 부모님을 모시고 담양의 유명한 떡갈비집에서 남동생 식구들을 만났다. 한우 떡갈비와 돼지갈비, 대나무통에 담긴 따뜻한 밥이 아빠 앞에 정성스레 놓였다. 아빠는 이 접시 저 접시로 한 번씩 젓가락을 가져갔지만, 통 입맛이 없는지 어린이가 먹는 양만큼 겨우 드신다.

"입맛에 안 맞아?"
"아니, 배가 별로 안 고파서 그래."

이게 다 얼마짜린데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솟아올라 오는 걸 꾸역꾸역 누르고 남편과 아들, 남동생과 조카들이 잘 먹는 것으로 감사하자 생각했다.

다음 날은 국수거리를 찾았다. 연휴라 붐비는 사람 가득한 길에서 한참을 기다린 끝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아빠는 시장하셨는지 먼저 나온 뜨거운 삶은 달걀을 두껍고 거친 손으로 야무지게 까더니, 호호 불며 맛있게 드셨다. 연이어 비빔국수도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내셨다.

그제야 내 속이 다 시원했다. 그래, 어제는 그저 컨디션이 안 좋으셨던 거구나. 안도하며 소쇄원과 담양호 산책로를 아빠의 느린 걸음에 맞추어 가만가만 걸었다.

담양에서 옛날 거리를 재현한 곳으로 유명하다는 관광지를 걷던 중, 아들이 뒤에서 DSLR 카메라로 외할아버지를 찍는 모습을 내 휴대폰 카메라 렌즈로 담았다. 순간 울컥 목이 메어 왔다.

이렇게 나의 아들은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나고, 나의 아빠는 노인의 모습으로 서서히 흐려져 가는구나. 중학교 2학년인데도 엄마와 살가운 명랑한 아들과, 팔순임에도 조경 일을 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딸에게 문자를 보내는 아빠. 이 두 사람의 시간이 이대로 멈춰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간절해졌다. 문득, 내가 아주 어릴 적 우리 아빠도 나와 같은 간절함을 품은 채 나를 바라보았을까.

고단해 하는 부모님을 숙소에 모셔다 드리고 우리 부부는 숙소에서 먹을 바비큐를 위해 근처 마트에 가 장을 보기로 했다. 고기를 많이 못 드신다고 해도 바비큐하며 세 식구가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 얘기 저 얘기 오래 하기에는 식당보다 나을 듯 싶었다. 숙소로 가는 차 안에서 과묵하던 아빠가 한마디 하신다.

"윤미야, 수박 한 통 사 와라. 수박 먹고 싶다."

젊고 푸르렀던 아빠의 모습

 슬픔 대신 기억할 함께한 시간의 충만함.
슬픔 대신 기억할 함께한 시간의 충만함. mafalou on Unsplash

서둘러 숙소로 돌아와 숯불을 피운 지 1시간이나 되었을까. 남편과 남동생이 번갈아 구워 주는 숯불 고기를 부모님 접시에 담자마자 두 분의 입속으로 고기가 빨려 들어간다. 냉장고에 넣어 둔 시원한 수박을 쩍 갈라 아홉 식구가 덤벼드니, 순식간에 빨간 속살들이 사라졌다.

그 유쾌한 포만감 속에서, 여행 내내 부모님을 잘 모시지 못했다는 찝찝함과 두 분의 건강에 대한 염려가 수박 국물처럼 시원하게 씻겨 내려갔다.

다음 날 아침, 익산 집 마당에 두 분을 모셔다 드리는데 그 와중에 텃밭에서 키운 상추와 깻잎을 따 주겠다고 나서신다.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오이를, 엄마의 타박을 들어가며 기어코 따서 손에 쥐여 주는 아빠다.

그렇게 아빠의 나이 든 뒷모습만 짐처럼 내 마음에 남겨두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얼마 전 집을 정리하다 발견한 낡은 사진 몇 장에, 젊고 푸르렀던 아빠의 모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던 겨울방학, 아빠와 단둘이 떠났던 제주도 여행 사진이다. 당시 자궁암으로 투병 중이던 엄마는 남동생을 친척 집에 맡기면서까지, 내게는 수술 사실을 비밀로 부친 채 아빠와 나를 일주일간 제주도로 떠밀 듯 보냈다.

사진 속 나는 사춘기 소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고, 아빠는 건장한 체격에 훤칠한 미남의 얼굴을 하고 있다. 아빠는 늘 입던 조경 작업복 대신 말끔한 양복을 입고 있었다. 딸과의 여행을 온전히 기념하고 싶었던 걸까.

수십 장의 사진 중 아빠와 내가 함께 찍힌 사진은 딱 두 장 뿐이었다. 산굼부리 기념 돌탑 앞에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본 사진 한 장, 그리고 어디에선가 내가 망원경을 보고 있고 아빠가 다정하게 눈높이를 맞추며 보는 법을 알려주는 사진 한 장. 저렇게 건장하고 다정했던 나의 아빠.

생각해보니 이번 여행이 중2 때 아빠와의 제주도 여행 이후로 33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단 며칠 만이라도 왜 시간을 따로 내지 못했을까.

죽녹원에서 댓잎이 쏴- 하던 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하다. 그렇게 빠르게 성장하는 대나무처럼 나의 아들은 건장하게 자라고 그 속도만큼 아빠와 남은 시간은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슬퍼하지 않기로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가장 눈부시고 든든했던 시절의 기억부터 가장 작고 연약해진 시절의 모습까지 온전히 내 마음에 품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한 일인가. 언젠가 내 아들도 나를 떠올리며 우리 사이의 시간을 아쉬워하는 날이 오겠지만, 그때 아들 역시 슬픔보다는 함께한 시간의 충만함을 감사히 여겨 주길 바랄 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https://blog.naver.com/doonber에도 실립니다.
#팔순여행 #가족여행 #아빠와딸 #담양 #죽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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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따뜻하고 건강한 세상을 꿈꾸며 글을 씁니다. 영어로 글을 쓴 경력은 21년이지만 한국어로도 써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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