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다고 생각했던 펜스 캄보디아 Pong Toeuk High School의 20톤 빗물식수화 시설. 학교 건물 옆 가장 좋은 자리에 설치되었지만 시설 주변에는 펜스가 없다. 학생과 교사, 지역사회가 함께 관리하는 방식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한무영
그런데 Pong Toeuk High School의 20톤 빗물식수화 시설에는 펜스가 없었다. 학교 건물 옆 가장 좋은 자리에 설치된 시설은 누구나 볼 수 있었고 누구나 다가갈 수 있었다. 학생들은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었고 시설은 숨겨져 있지 않았다. 물론 CCTV는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익숙하게 보아 왔던 '출입금지'의 분위기는 없었다.
나는 관계자에게 물었다.
"왜 펜스를 설치하지 않았습니까?"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학생들이 관리하니까요."
그 순간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 소중한 것을 우리는 꼭 자물쇠로 잠가 둘까? 집집마다 조상을 모시는 제단에는 자물쇠가 없다. 절에 가면 사람들이 올려놓은 돈이 있지만 하나하나 자물쇠를 채워 두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존중하고 지키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가장 좋은 보호장치는 철문이나 펜스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존중과 책임감인지도 모른다.
시설을 보호할 것인가, 주인을 만들 것인가
그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시설을 만들면 먼저 보호하려고 한다. 잠그고, 막고, 통제한다. 혹시 누군가 망가뜨릴까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세상에 절대로 망가지지 않는 시설은 없다. 펜스를 쳐도 망가질 수 있고, 자물쇠를 채워도 고장이 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망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망가졌을 때 다시 고칠 수 있는 능력이다.
Pong Toeuk High School은 그 점에서 다른 길을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 이 학교는 시설을 보호하기 전에 주인을 만들고 있었다. 학생들은 시설을 청소하고 수질을 측정하며 저장량을 기록한다. 또한 친구들에게 시설을 설명하고 직접 영상을 만들어 지역사회에 알린다. 그러니 시설은 더 이상 남의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이 된다.
시설이 더러워지면 학생들이 청소할 것이고, 문제가 생기면 함께 해결하려고 할 것이다. 고장이 나면 고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아닐까.
우리는 종종 회복탄력성을 어려운 전문용어로 설명한다. 그러나 쉽게 말하면 망가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이다. 망가져도 스스로 고칠 수 있는 사람, 망가져도 다시 운영할 수 있는 학교, 그리고 문제가 생겼을 때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오래 살아남는 시스템의 조건이다.
펜스는 시설을 보호할 수는 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을 키워주지는 못한다. 이번 방문에서 내가 본 것은 단순히 펜스 없는 시설이 아니라, 펜스를 세우는 대신 사람을 키우고 있는 학교였다.
나는 또 하나를 배웠다
지난 글에서 나는 지속가능성의 비밀을 배웠다고 썼다. 이번에는 또 다른 것을 배웠다. 신뢰도 중요한 관리기술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물관리를 이야기할 때 탱크의 크기와 수질, 처리기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람을 믿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학교는 나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시설을 지키기 위해 정말 펜스가 필요한가, 아니면 시설을 사랑하는 사람이 필요한가 하는 질문이었다.
물론 모든 곳에서 펜스를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나라와 문화, 지역의 상황도 다르다. 하지만 적어도 이 학교에서는 펜스보다 학생들의 자부심이 더 강한 보호장치처럼 보였다.
학생들은 물의 양을 측정하고 수질을 확인하며 시설을 청소한다. 또한 친구들과 부모에게 빗물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처음에는 작은 학교 안에서 시작된 활동이지만 이러한 경험은 가정으로, 이웃으로, 마을로 퍼져 나갈 수 있다.
한 사람의 지식은 작을 수 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배우고 경험을 나누면 집단지성이 된다. 나는 레인스쿨의 진정한 가치를 바로 여기서 보았다. 단순히 깨끗한 물 20톤을 저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물을 이해하고, 물을 관리하고, 물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을 키우는 일이었다. 이러한 집단지성이 학교를 넘어 마을 전체로 퍼져 나간다면, 그동안 외부의 지원에 의존하던 물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레인스쿨이 만드는 가장 중요한 시설은 빗물탱크가 아니라 사람들의 머릿속에 만들어지는 보이지 않는 지식의 저장조인지도 모른다.
나는 빗물 기술을 전수하러 갔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는 또 하나를 배우고 있었다. 좋은 물관리는 물만 관리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을 믿고, 사람을 참여시키고, 사람을 주인으로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어쩌면 펜스 없는 빗물식수화 시설은 물을 담는 저장조가 아니라 신뢰를 담는 저장조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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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빗물박사.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명예교수. 빗물의 중요성을 알리고, 다목적 분산형 빗물관리를 통하여 기후위기를 극복할수 있다는 것을 학문적, 실증적으로 국내외에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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