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표지
정한책방
그러던 어느 날, 내게 별안간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치솟았다. 없던 여유가 생긴 것도 아니었고,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던 것도 아니었다. 여름철 봉숭아꽃의 씨방이 톡 하고 터지듯, 그저 갑작스레 찾아온 충동과도 같은 것이었다.
팔이 닿지 않는 등 한가운데가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배탈이 나서 당장 화장실을 찾아 달려가야 하는 사람이 된 것처럼 그 욕망은 집요했다. 외면하려 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잠들기 전에도, 출근길 버스 안에서도, 설거지를 하는 순간에도 그 생각은 계속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내 이름 석자로서의 존재감과 타인의 인정이 필요했다. 내가 어깨에 둘러메고 있는 어떠한 역할로서가 아니라, 오롯이 나라는 인물로. 공인된 자격을 갖추지 않고서도 글을 쓸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AI에게 글을 쓸 수 있는 플랫폼을 물었고, 카카오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를 추천 받았다. 작가 승인만 받으면 된다는 조건이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특별한 준비도 없이 무작정 신청서를 제출했다. 2025년 5월 말, 그렇게 알게 된 브런치에서 나는 생애 처음으로 '작가'라는 호칭을 얻었다.
브런치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를 작가님이라 불렀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글 몇 편 올렸을 뿐인데 작가라니. 하지만 그 호칭은 내게 낯선 희열을 안겨주었다. 어쩌면 나는 누군가가 글을 써도 된다고, 계속 써도 된다고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자 욕심이 생겼다. 단순히 글을 쓰는 사람을 넘어 진짜 책을 낸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때부터 출판사 투고를 시작했다. 기획안을 쓰고, 출판사를 찾고, 메일을 보내고, 답장을 기다렸다. 때로는 정중한 거절을 받았고, 대부분은 아무 답도 받지 못했다.
답장이 오지 않는 메일함을 들여다보는 일은 생각보다 사람을 작아지게 만들었다. '역시 나는 안 되는 건가'라는 생각도 수없이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거의 20년 만에 다시 찾아온 글쓰기를 이번에는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도중 한 지인 분께 출판사 소개를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과 계약을 하게 되었다. 그 날짜를, 그 흥분감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우편배달부께서 건네는 계약서를 향해 뻗던 손의 떨림과 2025년 12월 31일의 추웠던 기온까지도.
책에 삽화가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출판사 대표님의 말씀에 대학 졸업과 동시에 놓았던 연필을 다시 잡았다. 굳어버린 손은 생각보다 말을 듣지 않았다. 수십 번 종이를 구기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그린 그림이 120여 점이었다. 교정 교열이 진행되는 몇 개월의 시간 동안 어물전을 훔쳐보는 고양이처럼 매일매일 출판사의 블로그를 검색했다.
그리고 지난 11일, 드디어 책 <어른들을 위한 B급 동화>가 세상에 나왔다. 글과 삽화와 인터넷 서점 안의 상세페이지까지. 정말 많은 곳에 나의 손길이 닿았다. 내가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덩달아 함께 즐거워 해주던 지인들과 '사기 당한 것이 아니냐'라고 걱정부터 하던 가족들, 출간되면 제일 먼저 알려 달라던 브런치 동료 작가님들께 연락을 했다.
내가 책 속에 담은 것

▲ 책에 들어간 삽화. 너무 오랜만에 그린 것이라서 그림이라 부르기도 부끄럽지만 그리는 과정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유수영
여간 쑥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내 생에 또 이런 일이 있을까 싶은 생각에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모든 지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바로 구매를 인증해 주시는 분부터 선물을 보내주시는 분, 덕담을 해주시는 분까지. 내가 세상을 바르게 살았구나 싶은 일들이 이어졌다. 브런치에서는 응원 댓글이 쏟아졌다.
책 안에는 내 40여 년의 세월 동안 겪었던 좌절과 질투와 분노 그리고 염원들이 담겨있다.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봤고, 어떤 것을 원했는지 빼곡하게 적혀있다. 물론 모든 작가들에게 자신의 책은 소중한 법이지만, 나에게 이 책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이 책은 출간의 결과물이기 이전에 20년 만에 다시 시작한 글쓰기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지난 14일, 나는 광화문으로 갔다. 대형 서점 안에 진열된 나의 책을 구경하고 싶었다. 그곳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창밖에 내리는 빗방울을 보자니 어쩐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느껴졌다. 나는 애써 그 감정을 무시한 채 눈을 감았다.
약 한 시간의 이동 끝에 서점에 도착했지만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이미 수없이 표지를 들여다보았지만 실제 서점은 달랐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작가들의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고, 그 사이에 내 책이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실감 나지 않았다.
한참을 헤맨 끝에 마침내 내 책을 발견했다. 평대 위에는 '신간'이라는 안내문이 놓여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춘 채 그 표지판과 내 책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분명 내가 쓴 책이 맞는데도 어딘가 낯설었다.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책을 꺼냈다. 새 책 특유의 잉크향이 맴돌았다.
생각해 보면 광화문까지 가서 확인한 것은 책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열여덟 살 이후 잊고 지냈던 글쓰기, 직장 생활과 육아를 이유로 미뤄두었던 꿈, 그리고 언젠가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마음이 정말 사라진 것이 아니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출간 이후에도 내 삶이 달라진 부분은 전혀 없다. 여전히 아침이면 출근을 하고, 퇴근 후에는 저녁을 준비하고 설거지를 한다. 아이들의 학교 준비물을 챙기고 밀린 빨래를 개는 일상도 그대로다.
하지만 이번 일을 겪으며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게 됐다. 오랫동안 손에서 놓았던 일이라고 해서 영영 끝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20년 가까이 글을 쓰지 않았던 나도 다시 글을 쓰게 되었고, 브런치에 글을 올리게 되었으며, 결국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광화문의 한 서점에서 내 이름이 적힌 책을 바라보며, 나는 뒤늦게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바쁜 일상에서 오래 전 포기했다고 생각한 꿈 하나를 가슴속에 묻어두고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나에게는 그것이 글쓰기였다. 그리고 그 글쓰기는 20년 동안 나를 잊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내가 그 글쓰기를 놓지 않을 차례다.
어른들을 위한 B급 동화 - 동화에 봉인된 뒷이야기
해온 유수영 (지은이),
정한책방,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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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지나가는 인물과 장소, 고단한 날들에서 흘러나온 진짜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사소해 보이는 순간들이 다른 누군가에게 닿아 위로가 되길 바라며,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는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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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그리기만 120여 점, '내 첫 책'을 위해 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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