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6.06.22 16:10수정 2026.06.22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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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챙겨온 정원용 장갑을 양손에 낀 채, 육중하고 까슬까슬한 줄다리기 밧줄을 손으로 움켜쥔다. 앞뒤로 밀착해 선 한국인, 독일인 엄마 아빠들은 양다리에 힘을 주어 단단히 중심을 잡고, 긴장한 채 호루라기 소리만을 기다린다.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팽팽한 줄다리기가 시작되고, 꼬리 쪽에 선 나도 죽을힘을 다해 줄을 잡아당긴다. 어느새 아이들이 안전거리 따위는 잊고 몰려와 힘차게 응원한다.
"청팀 이겨라!"
"홍팀 이겨라!"
방방 뛰며 목청껏 외치는 아이들, 좀처럼 우리 쪽으로 움직이지 않는 굵은 밧줄, 마치 목숨줄이라도 붙잡은 듯 기를 쓰는 부모들의 모습이 어우러져 묘한 초현실감을 자아낸다. 나는 평소 하루 운동량을 단 3분에 모조리 소진한다. 운동장이 미세하게 경사질 수 있으니, 자리와 대열을 바꿔가며 총 3번의 대결을 벌인 후 청팀이 최종 우승한다. 이긴 팀 부모들은 아이들 환호 속에 함박웃음을 짓고, 진 팀 가족은 한없이 아쉽다.
영혼을 끌어모아 함께 하는 운동회

▲운동회 마지막 순서이자 하이라이트 이어달리기 피날레를 장식하는 이어달리기. 학생 부문과 학부모 부문이 각각 진행된다.
백관숙
얼마 전 치른 한글학교 운동회 풍경이다. 아이들 줄다리기 후에 학부모 경기가 이어졌는데, 가볍게 나섰다가도 막상 경기가 시작되면 모두 영혼을 끌어모아 임한다. 다음날 어깨와 팔에 기분 좋은 근육통이 생기는 이유다. 하지만 승부는 금세 잊고 곧이어 다음 경기를 준비해야 하기에, 진 팀이 아쉬워할 시간은 짧다.
유치부에서 성인반까지 온 가족이 따로 또 같이 즐기는 이 행사는 한글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많다. 줄다리기, 이어달리기, 이인삼각 등 내가 기억하는 추억의 게임부터, 청색 홍색 패널 뒤집기 같은 새로운 게임도 있다. 가족들은 소풍 가듯 돗자리, 휴대용 의자, 탁자까지 챙겨온다. 매우 한국다운 풍경이다. 학생들이 준비한 K팝 댄스와 북 공연이 흥을 한층 더 돋운다.
열심히 땀 빼고 소리 지른 후, 가장 기다리는 점심시간이 이어진다. 일회용기 사용을 줄이려 각자 집에서 가져온 그릇을 들고 줄을 선다. 밥, 김치, 치킨, 샐러드, 김밥, 잡채, 불고기 등 실컷 한식을 먹는 날이다. 후식은 수박과 케이크다.
단 하루 열리는 운동회지만 준비할 거리가 워낙 많기에 학부모 운영위원회와 교사진은 일찌감치 꼼꼼하게 계획을 세운다. 인원 파악, 형제자매를 고려한 팀 나누기, 음식 주문과 배분, 각종 비품과 놀이 아이템 챙기기, 표지판 설치와 사후 청소까지 할 일은 끝도 없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즐길 환경을 만들기 위해 어른들이 기꺼이 자원봉사에 나선다.

▲청색 홍색 패널 뒤집기 게임 홍팀은 홍색이 위로 오도록 뒤집고, 청팀은 청색이 위로 오도록 뒤집어 정해진 시간에 더 많이 뒤집은 팀이 승리.
백관숙
이렇게 품이 많이 들어가는 운동회는 안타깝게도 이제 한국에서는 매우 드물다고 들었다. 대부분 학부모 민원이나 소음 민원 때문이라고 하는데, 적어도 이곳 독일에선 소음 민원 걱정은 없다.
우선 독일 유치원 초중고에는 교사, 학부모, 학생이 함께 참여하는 이런 대항전식 체육 행사는 없다. 주마다, 학교마다 다르니 "절대 없다"라고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내가 겪어본 베를린 학교들은 그렇다. 1년에 한두 번 가족들이 함께하는 '축제'가 열려 게임, 음식 코너, 음악과 춤, 바자회가 벌어지긴 하지만, 팀을 나누어 대결하는 몸 쓰기 위주의 게임형 운동회는 없다.
학생들만 참여하는 독일학교 체육대회도 주로 육상 경기 중심이라 각자 기량을 발휘하는 날이지, 한국식 운동회와는 결이 다르다. 아니면 아예 수영, 축구, 조정 등 종목별 특별 대회가 원하는 학생 위주로 자주 열린다. 체육을 강조하는 독일에서는 크고 작은 대회의 연속인 셈이다. 애고 어른이고 스포츠에 진심인 나라니까.
결국 게임과 운동의 통합, 팀 대항 경기, 열띤 응원전과 푸짐한 식사가 어우러진 이 행사는 베를린 한글학교의 독특한 '하이브리드' 행사다. 독일에는 없고, 한국에서는 점점 사라져가는 이벤트인 것이다.
승부를 겨루고 결과를 받아들이는 경험

▲운동회 이인삼각 달리기 한발씩 묶고 아이와 부모, 혹은 아이 둘이 한 팀으로 달리는 경기
백관숙
만 13세인 딸은 매년 이 운동회 승부에 집중한다. 공교롭게도 지난 몇 년간 홍팀이 계속 이겼는데, 올해 청팀에 배정받자 일단 억울해했다. 딸이 매 경기 온 힘을 다하고, 지면 원통해 할 때마다 내 목구멍까지 "괜찮아, 질 수도 있지. 즐겁자고 하는 행사야"라는 말이 차오른다. 하지만, 이럴 때는 우선 아이의 실망감에 공감해 주는 게 좋다고 들었다.
'그래, 나도 이기고 싶지. 지면 속상한 게 당연해.'
아이의 감정을 살핀 후 다음 경기를 준비하도록 돕는 게 옳은 일임을 안다. 인생에 승부는 늘 있기 마련이고, 누구나 질 때도 이길 때도 있으니까. 단 하루 운동회에서 짜릿함부터 원통함까지, 다양한 감정을 경험할 수 있으니 무척 고마운 행사다.
이기고 지는 건 잠시, 마지막엔 모든 아이가 동일한 한국 과자 한 봉지씩을 안고 헤어진다. 신나게 뛰고 맛있게 먹으며 친구들과 깔깔거린 추억이면 충분하다. 여러 번 참가한 고학년 아이들은 게임별 테크닉과 꿀팁을 착실히 쌓아가는데, 그렇게 마스터 레벨에 오를 즈음 한글학교를 졸업하게 되는가 보다.
한국에서는 더는 보기 힘든 이 품 많이 드는 행사가 베를린에서 매년 열리는 이유가 있다. 우선 행사 준비와 안전의 부담을 교사와 학부모가 나눠 가진다. 해외 사는 한국 학부모에게 자녀의 한국어 교육만큼 간절한 것이 없다. 독일에서 성인이 한국어 배울 기회는 많지만, 아이들이 배울 기회는 매우 적다. 거의 봉사직에 가까운 한글학교 교사는 사명감 없이는 힘든 자리다. 이런 고마운 학교에서 저렴한 수업료로 큰 행사까지 열어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그래서 힘들 걸 뻔히 알면서도 학부모들이 기꺼이 돕는다. 또한, 한글학교는 비영리 단체이기에 관할 구청에 저렴한 사용료를 내고 공립학교 사용 허가를 받을 수 있다. 마이크 소음이나 응원 함성을 신고하는 민원도 없다.
베를린에서 이런 운동회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1. 야외 활동과 운동을 강조하며, 실컷 뛰고 소리칠 아이의 권리를 인정하는 독일 문화
2. 자녀 한국어 교육이 귀하고 간절한 동포 부모들의 열정
3. 해외에서 한국 문화를 전승하는 교사진과 학부모 운영위의 봉사와 사명감
이 세 가지가 만나 어른 아이 모두 즐기는 독특한 '한독(韓獨) 운동회'가 매년 가능한 것이다. 어쩌면 운동회 문화는 본토에서는 사라지고 해외 동포들이 명맥을 이어가는 희귀한 행사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우리 딸은 내년에는 꼭 홍팀에 배정받고 싶다고 벌써 성토 중이다. 딸의 소원이 내년에도 열심히 한글학교에 잘 다니겠다는 소리로 들려, 나는 무척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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