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넷플릭스 시리즈 <참교육> 스틸컷
넷플릭스
퇴근길 지하철에서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을 흘깃 보았더니 여러 명이 비슷한 화면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이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무너진 교권, 그리고 그것에 맞서는 이야기 앞에서 낯선 얼굴들이지만, 비슷한 표정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한국 드라마가 교실의 위기를 소재로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은 수차례 있으나, 교권의 위기를 소재로 이토록 화제가 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드라마가 단순한 오락을 넘어 교육 현장의 심각한 문제를 정면으로 진단하고, 해결되지 않는 현실의 고통을 허구적으로나마 풀어냄으로써 대리 만족을 제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교사들이 수년째 광장에서, 국회 앞에서, 교육부 앞에서 외쳐온 교권 침해의 아픔은 입법의 언어로도, 집회의 목소리로도 좀처럼 사회 깊숙이 닿지 못했다. 그런데 드라마 한 편이 해냈다. 픽션이 현실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낸 사례다.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다. 드라마는 교사들의 고통을 전 세계에 고발했고, 이는 분명한 성취다. 다만 드라마 속 해결은 허구 안에서만 가능하다. 현실의 교실은 이야기가 끝나도 그대로다. 이제는 아픔을 공유하는 것을 넘어,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할 순간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
카타르시스 너머를 보아야
〈참교육〉이 제공하는 쾌감은 선명하다. 선이 있고 악이 있으며, 권선징악이 뒤따른다. 악랄한 학생과 학부모는 응징되고, 부패한 교사도 예외 없이 심판대에 오른다. 드라마는 이 점에서 균형을 잃지 않으려 하는데 교사를 일방적 피해자로만 그리지 않고, 부패한 교사의 에피소드도 함께 담는다. 선악이 어느 한쪽에 독점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드라마가 현실을 어느 정도 직시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드라마다. 현실의 교실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대부분은 명확한 악의에서 비롯되지 않으며 의도하지 않은 오해, 계획되지 않은 실수, 서로 다른 기대치가 충돌하며 만들어지는 복잡한 감정의 덩어리들이다. 극단적인 악인이 존재하는 현장보다, 서로가 서로를 상처 입히면서도 그것이 상처인지조차 모르는 현장이 훨씬 많다.
그런데 드라마는 이 복잡함을 지워버린다. 그리고 거기서 두 가지 위험이 생겨난다. 허구의 세계에 너무 심취하여 본질을 직면하지 못하거나, 드라마의 이분법적 인식을 현실에 그대로 투사하는 것이다. 드라마의 렌즈로 현실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내 앞의 학부모는 악역이 되고 내 앞의 교사는 무언가를 숨기는 자가 된다. 폭력적인 세계에 동일한 폭력적 인식으로 맞서는 순간, 우리는 드라마보다 더 엉킨 현실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렇다고 명확한 악의를 가지고 일으킨 상황을 간과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교사를 조직적으로 괴롭히거나, 허위 민원으로 수업을 무력화하거나, 학생을 도구로 삼아 학교를 흔드는 행위들이 있다. 이런 사례는 회복을 논할 것이 아니라, 선명하고 단호한 책임의 과정이 사회정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흐리는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런 극단적 상황만이 교실의 전부라고 매도하는 것 역시 또 다른 불신과 단절을 만들어낸다.
지금 이 시점, 드라마의 열기는 하나의 기회다. 교사들의 고통이 사회적으로 공론화된 이 순간을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허구의 카타르시스를 넘어,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진단은 개인의 도덕성이 아니라 구조에서 시작해야 한다.
소수의 목소리가 다수의 일상을 삼키는 구조
단순히 나쁜 학부모가 늘었기 때문인가. 아니면 교사의 사명감이 떨어졌기 때문인가. 이런 접근은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축소한다. 구조를 보지 않으면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김현수 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이 상황을 '발언의 비대칭(asymmetry of voice)'이라는 개념으로 짚은 바 있다. 학교가 소풍을 포기하고 운동회를 없애는 것은 학부모 대다수의 뜻이 아니라, 소수의 격렬한 민원이 침묵하는 다수를 압도한 결과라는 것이다. 항의하는 목소리는 집중적이고 즉각적이지만, 소풍을 기다리던 아이들의 실망은 분산되고 지연되어 행정에 닿지 않는다. 시스템은 자연스럽게 소수의 분노를 회피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그렇게 '방어적 행정'이 자라난다. 공적 서비스가 '고객 만족'의 언어로 재편될수록 교사의 전문적 권위는 축소되고, 보호받지 못하는 전문성은 결국 현장을 떠난다.
방어적 행정이 자리를 잡으면, 학교는 점점 더 소극적으로 움직인다. 소풍을 없애고, 체육대회를 축소하고, 민원의 빌미를 줄이기 위해 교육 자체를 줄여간다. 그 결과 가장 많은 것을 잃는 것은 정작 학교다움을 원했던 다수의 학생과 학부모다. 소수가 만든 구조가 다수를 침묵시키는 이 역설이 오늘 한국 교육 현장에서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구조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전에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분노하는가, 교육 본질의 붕괴
지금 교육 현장의 분노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나쁜 학부모인가, 무능한 관료인가, 아니면 무너진 시스템인가. 보다 근본적으로 들여다보면, 분노의 밑바닥에는 교육의 본질이 무너졌다는 감각이 자리한다.
파커 파머는 <가르칠 수 있는 용기>에서 역사 연구란 과거의 세계와 연결되고자 함이고, 문학 연구란 상상력의 세계와 연결되고자 추구하는 것이며, 영적 욕구란 자신의 자아보다 더 큰 그 무엇과 연결되고자 하는 추구라고 말한다. 가르친다는 것은 바로 그 '연결됨의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며 '연결'은 교육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연결, 지식과 삶 사이의 연결, 현재와 미래 사이의 연결. 이 모든 연결이 교육이라는 행위 안에서 살아 숨쉰다.
지금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바로 그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교사는 학부모의 눈치를 보느라 수업에 집중할 수 없고, 학부모는 교사를 신뢰하지 못해 불안하며, 학생은 그 사이에서 누구에게도 온전히 연결되지 못한 채 표류한다. 교사에 대한 존경과 존중이 사라졌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교사 개인에 대한 예우의 문제가 아니다. 가르침과 배움이 연결되는 통로가 막혔다는 것, 교육이라는 행위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드라마 〈참교육〉이 학생과 학부모를 일방적인 악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부패한 교사의 에피소드가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참교육의 핵심은 특정 집단의 응징이 아니라, 교육의 본질에서 벗어나버린 지금의 문제 상황을 진단하고 이를 제자리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렇다면 각자의 자리는 어디인가. 연결은 역할의 경계가 분명할 때 비로소 건강하게 작동한다.
교육 3주체론의 재정립, 권리와 책임의 구조
최근 '교사는 교육의 주체, 학생은 학습의 주체, 학부모는 양육의 주체'라는 주장이 교육 현장의 고통이 깊어지면서 힘을 얻고 있다. 현장의 절박함에서 나온 말이니 그 무게를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논리의 층위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학생을 학습의 주체로, 학부모를 양육의 주체로 정의하는 것은 일면 타당하다. 하지만 동일한 층위에서 교사를 '교육의 주체'로 정의하는 것은 범주의 오류에 해당한다. 교육기본법이 정의하는 교육은 지식의 전달에 그치지 않고 인격 형성과 사회화를 포함한다. 그 의미에서 교육은 학습, 양육, 생활 지도를 아우르는 상위 개념이다. 교사를 같은 층위로 놓는다면, 교사는 '학습 및 생활 지도의 주체'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교사, 학생, 학부모는 각자 다른 역할을 가지면서도 함께 '교육의 3주체'가 된다.
교사의 가르침, 학생의 배움, 학부모의 뒷받침이 함께 어우러질 때 비로소 한 아이의 성장은 가능하다. 각자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은 누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서로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단, 협력은 역할의 경계가 분명할 때 비로소 건강하게 작동한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권리와 책임의 문제 때문이다. 권리만 있고 책임은 없는 주체는 있을 수 없다. 교사의 수업권과 평가권은 교사의 전문적 권한이자 책임의 영역이다. 이것은 학생이나 학부모가 임의로 개입하거나 대신하거나 번복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수행평가 점수를 바꿔달라는 요구, 생활기록부 문구를 수정해달라는 압박, 이것은 의견 개진이 아니라 교사의 전문적 권한에 대한 침해다. 이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것이 교육 현장에서 수많은 혼란을 낳는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교사에게 학부모가 해야 할 영역까지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아이가 친구와 다툴 때마다 교사에게 중재와 해결을 요구하거나, 가정에서의 감정 문제를 학교가 책임지길 기대하는 것이 그 예다. 아이의 생활 습관, 정서 조절, 가정 내 관계 회복 등은 상당 부분 가정의 영역이다. 이것을 교사에게 일체 전가하는 것은 교사의 전문적 역할을 왜곡한다.

▲제6차 교육 진담 간담회에 참여한 최교진 교육부 장관 <참교육> 드라마와 관련하여 가상의 교권보호국은 보는 이에게 일종의 통쾌함을 주기도 하지만 현실의 교육 문제는 응징이나 대립이 아니라 존중과 신뢰, 그리고 협력을 통해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을 밝힘. 최교진 교육부 장관은 <참교육> 드라마와 관련하여 가상의 교권보호국은 보는 이에게 일종의 통쾌함을 주기도 하지만 현실의 교육 문제는 응징이나 대립이 아니라 존중과 신뢰, 그리고 협력을 통해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을 밝혔다.
교육부
그렇다고 학생과 학부모의 의견 개진 자체를 막아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교육기본법 제13조는 보호자가 자녀의 교육에 관해 학교에 의견을 제시할 수 있으며 학교는 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동시에 같은 조항은 보호자가 교원의 전문적 판단을 협조하고 존중해야 한다고도 명시한다. 권리와 책임이 같은 조문 안에 함께 담겨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은 성숙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일방적인 요구가 아니라, 함께 의견을 만들어가고 함께 노력과 책임을 겸비해 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권리는 책임과 함께할 때 비로소 공동체 안에서 온전히 작동한다.
교육공동체 회복, 환영과 냉소 사이에서
최근 교원단체 좋은교사운동을 비롯하여 학부모단체, 교육 시민단체가 함께 '교육공동체 회복'을 선언한 바 있다. 반응은 엇갈렸다. 환영의 입장과 냉소의 입장이 동시에 드러났다. 냉소도 이해할 수 있다. 선언이 현실을 곧바로 바꾸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교원공동체 신뢰 회복 국민운동 2026년 6월 16일 교원단체 좋은교사운동을 포함한 11곳이 ‘교육공동체 신뢰 회복 국민운동’을 출범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하고 있다.
교육공동체 신뢰 회복 국민운동
그러나 이번 선언을 단순한 구호로 치부해서는 안 될 이유가 있다. 교육은 태생적으로 상호 간의 존중과 연결을 기반으로 한다. 그 본질을 함께 되찾자는 선언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적 선택이다. 문화는 거대한 제도의 변화 못지않게 수많은 작은 선택의 집적으로 만들어진다.
마르틴 부버는 인간의 관계를 두 가지로 나누었다. 상대를 해결해야 할 문제나 수단으로 바라보는 '나-그것(I-It)'의 관계와, 상대를 온전한 인격으로 마주하는 '나-너(I-Thou)'의 관계다. 교사를 민원 처리 대상으로, 학부모를 잠재적 민원인으로 바라보는 순간, 교육공동체는 이미 '나-그것'의 관계로 전락한다. 교육공동체 회복이란 결국 이 관계를 '나-너'로 되돌리는 일이다. 교사에 대한 존중, 수업권과 평가권에 대한 신뢰, 학생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 학부모에 대한 예우. 이것이 당연한 것으로 회복되는 일이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
물론 선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악성 민원을 걸러내는 절차적 제도, 교육공동체를 무너뜨리는 행위에 대한 분명한 책임. 이것이 먼저 작동해야 교사들이 비로소 대화의 자리로 나올 수 있다. 문화의 회복은 그 안전한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잘못된 소수에게는 분명한 책임을 묻되, 그로 인해 교육공동체 전체의 신뢰가 무너지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문화와 구조가 함께 바뀔 때, 선언은 비로소 선언 이상의 것이 된다.
현실은 드라마보다 복잡하고, 그래서 더 값지다
다시 드라마로 돌아오자. 〈참교육〉은 굉장히 단순한 서사를 가지고 있다. 선악이 있고, 권선징악이 뒤따른다. 그 단순함이 주는 쾌감은 강렬하다. 그러나 현실의 교실은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는다. 그래서 어렵다. 그래서 또 값지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더 많은 경우는 의도하지 않은, 계획적이지 않은 오해와 실수와 감정이 버무려진 세계다. 명확한 악의가 아니라, 지쳐 있는 교사와 불안한 학부모와 상처받은 학생이 서로를 향해 어설프게 손을 뻗다가 엇갈리는 장면들이다. 그런 예상치 못한 결과 앞에서 서로의 의도를 헤아려보고 존중해보는 시도, 그것은 드라마보다 훨씬 더디지만 훨씬 더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낸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되돌릴 수 없는 인간 행위의 곤경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용서'라 했다. 우리가 서로에게 한 일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 행위의 결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교사도, 학생도, 학부모도 각자의 방식으로 상처를 안고 있다. 그 상처를 인정하면서도, 그 상처가 상대를 향한 무기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 어긋난 관계에서 새로운 시작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드라마가 결코 보여줄 수 없는, 그러나 교실에서만 가능한 회복의 방식이다.
〈참교육〉은 드라마로 끝나야 하며, 우리의 교실은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 발을 딛고 서야 한다. 현실에서의 해법은 드라마보다 훨씬 더디고, 더 복잡하며, 더 많은 인내를 요구할 것이다. 소수의 격렬한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는 제도를 만드는 것도, 교사와 학생과 학부모가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하는 것도, 끊어진 연결을 다시 잇는 것도 모두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시작은 언제나 작은 선택에서 비롯된다. 교사를 신뢰하는 것, 학부모의 의견을 성숙하게 듣는 것, 학생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 이 선택들이 쌓여 문화가 되고, 문화가 쌓여 구조를 바꾼다.
드라마 〈참교육〉이 준 것은 분노와 카타르시스다. 그러나 분노는 출발점이지 목적지가 아니다. 분노를 넘어, 진단을 넘어, 이제 우리는 회복을 이야기해야 한다. 교사에 대한 존중, 수업권에 대한 신뢰, 학생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 학부모에 대한 예우. 드라마가 아닌 그 자리에, 대한민국의 참교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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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현장과 제도, 그 사이의 틈을 들여다보며 글을 씁니다.
교사로 시작해 교육운동과 정책연구를 거쳐 교육의 오늘과 내일을 함께 그려가고 있습니다.
현 좋은교사운동 정책위원장 / 전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연구원 / 전 미추홀외국어고 교사 / 공저 『대한민국 교육트렌드 2025』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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