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세진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양철 우산>(걷는사람, 2026년) 표지
걷는사람
검은 머리도 흰머리도 아니게 된 것이 시간의 어느 사이가 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호랑나비가 앉은 무게를 견디느라 풀잎이 조금 내려앉았을 때가 어느 사이는 아닌 것처럼//검은 머리카락이 늙어 은빛이 된 것은 아니다 은빛 머리카락은 요즘 태어난 것들이고 검은 머리카락보다 나이를 먹지도 않았다 흰 머리카락들이 생겨난다면 가장 앳된 것들이 될 것이다
- <은빛 머리카락> 중에서
시인은 엉뚱하거나 이상한 생각을 하는 존재가 아니다. 새로움에 대한 강박증에 사로잡힌 존재도 아니다. 시인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시인은 뒤따라오던 아내가 한 말에 대하여 "검은 머리도 흰머리도 아니게 된 것이 시간의 어느 사이가 되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는 생각을 스치듯이 해보는 존재랄까.
이 시의 미덕은 그런 조금은 아리송한(?) 생각조차 "호랑나비가 앉은 무게를 견디느라 풀잎이 조금 내려앉았을 때가 어느 사이는 아닌 것처럼"이라는 멋지고 적절한 시구로 시의 소통을 원활하게 해준 데 있다. 일종의 문학적 친절함이랄까. 시에서 친절함은 미덕이기는커녕 흠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식의 우아한 친절함은 독자로서 대환영이다.
그런데 "검은 머리카락이 늙어 은빛이 된 것이 아니다"라니? 처음에는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검은 머리가 흰머리가 되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이 아닌가.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화자의 말이 다 맞다. "흰 머리카락들이 생겨난다면 가장 앳된 것들이 될 것이다"라는 구절에 와서는 무릎을 칠 수밖에 없다. 너무도 당연한 현상인데 그것을 밝혀낸 관찰력이 놀랍다. 시인은 그런 존재다. 당연한 일로 무릎을 치게 하는.
즐거운 발견이랄까. 새로움에 대한 강박증이 아닌 생에 대한 다정함과 차분한 관찰력으로 얻어낸 것들이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은 화룡점정이 되겠다. "검은 것, 은빛인 것, 흰 것, 한 몸에서 자라는 서로 다른 기후대의 식물"이라니! 시집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자. 맨 앞에 자리한 시다.
핏줄을 몇 떠나보내고 돋보기 안경을 몇 번 바꾸고 나니 이상한 것들이 보인다//입을 잔뜩 벌린 아기새에게 배추흰나비 아기를 물어다 먹이는 어미새의 진저리가 보이고 황토물에 떠내려 가지 않으려고 물풀을 물고 있는 각시붕어 입술의 파리함이 보이고 알을 낳은 후 풀줄기를 붙잡고 미라가 된 암사마귀의 마지막 간절함이 보인다
- <무서운 일 1> 중에서
살다 보면 겪게 되는 아픔과 불행이 타자의 고통과 상처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한 사람의 내면을 다지고 성장하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시의 화자는 "핏줄을 몇 떠나보내고 돋보기 안경을 몇 번 바꾸고" 나니 "미라가 된 암사마귀의 마지막 간절함이 보인다"고 술회하고 있다.
화자는 "그런 모습이 보이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몇 번은 더 안경을 바꿔야 한다"라는 다짐 비슷한 것으로 시를 끝맺는다. 그런데 왜 그것이 무서운 일일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고 독자로서 오독의 자유를 누릴 수도 있겠지만 시집 맨 마지막 장에 와서야 그 궁금증이 풀렸다.
시 <무서운 일 2>의 화자도 "봄에 본 나비들이 모두 맷노랑나비처럼 겨울을 나지 않는데 가을에 끝나고만 그 많은 날개들은 어디로 갔을까"라고 궁금증을 품는다. 다음은 시의 마지막 연이다.
끝난 날개들이 순간들과 옹이구멍에 고여 함께 나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끝나는 날 찾아와 오래 기다렸다고 다독여 주지 않는다면 너무나 무서운 일
-<무서운 일 2> 중에서
2연의 "나비를 따르다가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는 걸 지켜본" 것은 아마도 유년의 기억이리라. 시인을 일컬어 유년을 지속해서 사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 시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끝나는 날 찾아와 오래 기다렸다고 다독여주지 않는다면"이라는 일종의 부정적인 단서, 혹은 조건이다. 그 귀결이 "너무 무서운 일"인 셈이니 만약 끝나는 날 찾아와 오래 기다렸다고 다독여 주었다면?
다시 <무서운 일 1>로 돌아가자면, 그 다독임의 능력이랄까 소양이랄까 하는 것이 시의 화자가 겪은 몇 번의 불행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다만, 천세진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양철 우산>에서 만나본 화자들은 그 다독임으로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이루려는 것은 아닌듯하다.
가령, 시 <일부의 서랍>에서 화자는 "어디선가 흘러온 것들의 일부로 비빔국수를 만들어 먹"으면서 "여름 저녁 석양의 일부가 국물처럼 그릇에 담"기는 것을 본다. "이런 일은 자주 있었"고 "매일 밤 어둠의 일부를 덜어냈다"고도 적었다. 하지만 "내 서랍이 세계의 일부를 담는 곳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어떤 선을 긋는 모양새다. 시는 이렇게 끝이 난다.
오늘 어둠은 어제보다 조금 짙다 달의 일부가 사라졌다 어둠의 일부를 떼어 내 핀을 꽂고 채취한 날과 시간을 적는다 이런 일이 뭔가를 이루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 <일부의 서랍> 중에서
시 <고민을 그만두고>에서는 천 시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태도랄까 인식이랄까 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시의 화자는 "아름다움이/항아리 속에 살고 있을 것 같아/어느 봄날 작은 항아리를 사서" 속을 깨끗이 닦아/볕 잘 드는 곳"에 둔다. 그 후 시간이 흐르면서 빗물이 담기고 먼지와 홀씨들이 날아들고 "가을이 끝났을 때쯤엔/빗물이 일곱 번째로 말랐고/일곱 개의 지저분하고 거뭇한 줄이/항아리 바닥에 남"는다. 이 시의 마지막 두 연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을 바꾸거나
항아리를 씻어 두고 기다리는 일을
더 시도해 볼지를 고민했으나
하지 않았다
몸의 바닥에 생긴 몇 개의
거뭇한 줄에 대해서는 생각했고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 <고민을 그만두고> 중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탐색은 실패로 끝난 듯한데 화자는 "몸의 바닥에 생긴 몇 개의/거뭇한 줄에 대해서 생각" 한다. 이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바뀐 것이 아니라 완성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봐야 옳겠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시인의 욕망이자 책무일 수도 있는데 "더 고민하지 않기로" 한 것. 그럼에도 아름다움에 대한 화자의 태도에 대해 공감 이상의 시적 울림이 느껴지는 이유다.
시나 예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도 완성에 대한 목적 의식이 지나치다 보면 자칫 독선이나 아집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읽히기도 한다. 앞에서 언급한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경계심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천세진 시인은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시집 <순간의 젤리> <풍경도둑>, 장편소설 <이야기꾼 미로>, 문화비평서 <어제를 표절했다>, 산문집 <작은 날씨들의 기억>등을 냈다. 일간지 문화 칼럼 필진으로, 웹진 <초록의자> 주간을 맡고 있고 전업 작가로 전주에서 살고 있다.
양철 우산
천세진 (지은이),
걷는사람,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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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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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이 은빛이 되었네" 아내의 말에 남편이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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