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앞에 허수아비 조각품이 설치되어 있다
김군욱
정릉골의 새벽 5시부터 긴장 속에서 시작된다. 언제 다시 강제집행이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연대인들은 이른 시간부터 골목에 모여 마을을 지킨다. 누군가는 입구를 살피고, 누군가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는 하루 종일 현장에 머문다.
하지만 이곳에서 마주한 장면은 '대치'만이 아니었다. 낡은 벽에는 그림이 그려지고, 나무판에는 판화가 새겨졌다. 버려진 옷과 나무, 자재들은 작은 조각이 되어 마을 곳곳에 놓였다. 목요일 저녁이 되면 골목에는 노래도 울려 퍼졌다.
철거를 앞둔 마을에서 예술은 시간을 보내는 일이 아니었다. 함께 버티는 방식이었다.
정릉골은 재개발 사업이 진행 중인 지역이다. 이미 많은 집들이 비어 있거나 부서졌고, 골목 곳곳에는 철거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곳에는 아직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각자의 사정은 다르지만,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 문제다. 갈 곳이 마련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주는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삶의 기반을 잃는 일이다.
그래서 연대인들은 정릉골을 찾는다. 강제집행이 시도될 때마다 몸으로 막아서기 위해서다. 그러나 현장의 시간은 충돌의 순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다리고, 지키고, 밥을 나누고,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길게 이어진다.
그 긴 시간을 정릉골의 연대인들은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 정릉골 벽에 글려진 벽화
김군욱
예술인들이 먼저 붓과 도구를 들었다. 한쪽에서는 그림을 그리고, 버려진 재료들로 조각을 만들었다. 판화 작업이 진행되면 현장을 지키던 연대인들도 함께 손을 보탰다. 그렇게 정릉골의 골목에는 하나둘씩 작품들이 생겨났다.

▲ 강제 집행이 들어왔던 위원장 잡에 그려진 그림
김군욱
작품이 놓인 자리는 반듯한 전시장과 거리가 멀었다. 금이 간 벽, 부서진 집터, 쓰레기가 쌓인 골목, 철거의 흔적이 남은 담벼락이 작품의 자리가 되었다. 그래서 정릉골의 작품들은 마을을 예쁘게 꾸미는 장식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상처 난 공간 위에 아직 사람의 손길이 닿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목요일 저녁이면 또 다른 방식의 예술이 정릉골을 채운다. 문화제가 열리는 날이다. 하루 종일 마을을 지킨 사람들, 강제집행의 불안 속에서 버티는 주민들, 그리고 그 곁에 선 연대인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가수들은 그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

▲ 가수 황푸하님이 연주하고 있다
김군욱
무대에 선 황푸하 가수는 최근 발표한 신곡 '난기류'를 부르며 "두려움은 있지만, 그 불안과 공포를 넘어 끝까지 함께 연대하고 투쟁하자"고 연대인들의 마음을 다독였다.
목요일의 문화제는 연대인들에게 다시 현장에 설 힘을 주었고,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전했다.
재개발 현장에서 세입자들은 자주 숫자나 보상 기준, 철거 일정 속에 가려진다. 하지만 정릉골의 벽화와 조각, 목요일마다 울려 퍼지는 노래는 다른 말을 건넨다. 이곳은 빈 땅이 아니며, 아직 삶이 남아 있는 장소라고.
예술인들의 참여는 연대의 방식을 넓혔다. 누군가는 몸으로 길을 막고, 누군가는 밥을 짓고, 누군가는 법률과 행정 절차를 살핀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판화를 새기고, 조각을 만들고, 노래를 부른다. 방식은 다르지만 향하는 곳은 같다. 정릉골에 남은 사람들이 함부로 지워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 판화를 인화하고 장면
김군욱
현장을 지키러 온 연대인들도 작업에 함께했다. 붓을 들고, 판화를 찍고, 조각을 옮겼다. 문화제가 열리는 목요일에는 노래를 들으며 박수를 치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강제집행을 막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단지 '대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마을의 현재를 함께 만드는 사람들이 되었다.
정릉골의 벽화와 그림들이 언제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재개발이 계속되는 한, 마을의 풍경은 또 바뀔 수밖에 없다. 어쩌면 오늘 그린 그림이 내일 사라질 수도 있다. 목요일 저녁에 울린 노래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 정릉골 벽에 그려진 벽화
김군욱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작업은 더 절실하다. 사라질지도 모르는 공간에 남기는 그림과 판화와 조각,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들은 노래는 이곳에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함께 온 이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된다.
정릉골에서 예술은 전시장 안에 걸린 작품이 아니었다. 무대 위에서만 소비되는 공연도 아니었다. 강제집행의 위협 앞에서 서로의 곁을 지키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정릉골에는 아직 사람이 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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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릉골 골목에 그림이 걸리고, 목요일마다 노래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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