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지고 열매가 떨어져도 희망을 가지면, 삶은 살아진다

정익진 시인의 시 <낙과여낙화(落果與洛花) >를 읽고

등록 2026.06.26 15:15수정 2026.06.26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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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과여낙화 (落果與洛花)

세무서 바깥 벤치에 앉아
살살 아려 오는 아랫배를 만지며
벚꽃 잎 날리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건너편 동산빌라 옆집,
칠 벗겨진 철제문이 삐걱 열렸습니다.
낡은 가구들이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여자가 나왔습니다.

지팡이에 온몸을 싣고 곧 허물어질 기둥처럼,
한 걸음 한 걸음이 무너질 듯,

햇살 속 물고기 같은 얼굴로
내가 앉은 벤치 쪽으로 다가왔습니다.

벚꽃 떨어지는 것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앉아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래요. 빨래를 건지려다 옥상에서 발을 헛디뎠어요.
오전 여덟 시에 떨어져
오후 여섯 시에 들것에 실려 갔죠.

여섯 달 동안
깨어나지 못했어요.

스물넷이었어요, 그때가.
지금은 예순, 환갑입니다.

벚꽃 계속 떨어지고

- 정익진, <헤드기어를 쓴 간호사들>, 18~19쪽

어느덧 제 나이도 오십 초반을 넘어섭니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 아득합니다. 살도 무르고, 독하지 못한 내가 어찌 저 삶을 살아낼 수 있었을까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다'라고요. 맞습니다. 때때로 이 말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세의 범선들은 바람과 물결에 의지해 항해했습니다. 동력도 없고 지도도 불완전한 바다 위에서, 배는 오롯이 자연의 힘으로 움직였습니다. 때로는 배가 폭풍우에 길을 잃기도 했고, 거센 파도 앞에서 무력하게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순풍을 만나면 나아가고 역풍을 만나면 멈춰 서야 했습니다. 저 범선의 행로, 우리의 삶과도 참 많이 닮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삶은 순풍이지만, 길고 긴 역풍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이 삶이라고. 참 얄궂은 말이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도 젊었을 때는 누구보다 멋지게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살면서 제가 마주한 삶은 예측 불허의 삶이었습니다. 내 손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폭풍처럼 밀려와 온몸을 흔들었습니다. 이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최선을 다해, 꾹 참는 일뿐이었습니다. 오늘 얘기하는 화자의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요. 빨래를 건지려다 옥상에서 발을 헛디뎠어요./ 오전 여덟 시에 떨어져/ 오후 여섯 시에 들것이 실려 갔죠.// 여섯 달 동안/ 깨어나지 못했어요.'

짐작건대 화자는 오전 여덟 시에 빨래를 널거나 걷으러 나간 것 같습니다. 보통의 나날이였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테지만, 그날은 빨래 하나가 난간 쪽에 떨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 빨래를 주우려다가 발을 헛디뎠던 것이고, 여자는 옥상에서 지상으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가장 운이 나빴던 것은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는 점인데요, 오후 여섯 시에야 들것에 실려 갔다는 의미는, 누군가 퇴근하고 집에 와서야 그녀를 발견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녀가 추락한 날은 어떤 날일까요. 엄청난 바람이, 아니 태풍이 부는 날일 것입니다. 범선이 암초에 좌초한 날이며,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배가 망가져 발만 동동 구르는 날이기도 합니다. 낙과여낙화(落果與洛花)의 날. 떨어진 열매와 떨어진 꽃과 같은 스물넷의 그녀처럼.

 정익진 시인의 시집 <헤드기어를 쓴 간호사들>
▲ 정익진 시인의 시집 <헤드기어를 쓴 간호사들> 걷는사람

그런데요. 낙과여낙화(落果與洛花)는 비극적인 문장이기도 하지만, 일말의 희망을 찾을 수 있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비바람에 떨어진 꽃과 열매가 거름이 되어 그다음 봄을 찬란하게 피워내듯, 희망만 잃지 않는다면, 삶의 추락 역시 내 후반부의 삶을 틔워내기 위한 (다소 아픈) 준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모습에서도 희망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스물넷에 추락해 이제 예순이 된 여자는 지팡이를 짚고 나와 떨어지는 벚꽃을 바라봅니다. 비록 자신의 일부가 부서지고 상처를 입었을지라도 결코 삶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여자는 그에게 묻습니다. '앉아도 되냐'고. 이렇듯 묻는 행위는 단순한 물음이 아니라, 타자와 연결될 수 있다는 희망의 기표이기도 합니다.

꽃이 지고 열매가 떨어지는 불가항력의 바다 위에서, 우리가 난파되지 않고 끝내 살아낼 수 있는 까닭은 우리의 배가 크고 넓거나 선체가 단단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외로움이 또 다른 외로움에게, 상처 입은 자가 상처 입은 자에게 기댈 줄 아는 그 연약한 의지와 용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의지와 용기는 우리에게 방향타가 되어, 목적지까지 묵묵히 이끌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 시인 이력 (출판사 제공)

- 정익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7년 계간 《시와 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구멍의 크기』 『윗몸일으키기』 『낙타 코끼리 얼룩말』 『스캣』을 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네이버 블로그 <시를 읽는 아침>에도 실립니다.

헤드기어를 쓴 간호사들

정익진 (지은이),
걷는사람, 2026


#정익진시인 #낙과여낙화 #걷는사람 #신작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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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쓰기 보다 시읽기와, 시소개를 더 좋아하는 시인. 2009년 계간 『시인시각(현 시인동네)』 시 부문 신인상과 2019년 『불교문예』 문학평론 신인상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 『인류는 멸종을 예약했습니다』등 세 권의 시집을 출간했습니다. 동네책방과 도서관에서 북토크로 독자를 만나고 있습니다. 이메일 yhjoo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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