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6월 4일 조선일보 기사 소사간이학교(素砂簡易學校)가 1938년 5월 2일 입학, 6월 2일 개교했으며 군수 대리 이하 다수 내빈과 삼십육명 아동 학부형 등이 참석하여 성대히 이루어졌다고 전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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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농장 주임으로 소작인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간이학교를 설립한 수등정웅은 칭찬 받을 만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동아일보는 수등정웅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동 회사의 지배인으로 농장 총통인 수등정웅씨는 37의 청년으로 소성이 명쾌한데 농촌 정황에 정통하야 빈약을 죄악시 하지 않는 종교인이다. 씨의 철저히 양휘하는 부덕은 20년간에 효성같이 빛나고 있으니 어려운 일이다. 일천의 소작인이 이구동성으로 씨를 찬한다. 씨는 800여원을 드려서 30평의 교사를 짓고 강사 1인을 제공하야 부근 빈가 자녀를 교양하니 참 희한한 일이다. 일반은 감하(感賀)가 많다.
출처: 1936년 8월 5일 동아일보
하지만 부천 소사에서 활동했던 수등정웅의 행적을 보면 간이학교가 단순히 교육만을 위한 것이아니라 일제의 농지 침탈과 소작인으로 전락한 조선인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수등정웅은 그 당시 소사에서 활동한 일본인들 중에 일명 마당발이었다. 참여한 단체와 활동내용이 화려하다.
첫번째, 소사재향군인분회장
1937년 수등정웅은 소사재향군인분회장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1937년 일제의 침략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지원병을 모집하였는데 부천에서 모집된 조선인들은 소사신사에 참배하고 소사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소사재향군인분회장으로서 수등정웅은 이러한 행사를 주관하였다.
두번째, 부천군사후원연맹
조선총독부는 1937년 8월 9일 비상시국을 맞이하여 일본군들의 분투에 감사하여 무운장구를 기원하기 위해 부천군사후원연맹을 결성하였다. 수등정웅은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세번째, 오정방공단
일제의 침략 전쟁은 한반도를 안전지대에서 전쟁이 발생할 수 있는 지역으로 만들었다. 하늘을 통해 전투기가 침범하여 폭탄을 투하할 수 있어 일제는 방공단을 만들었다. 1938년 10월 오정방공단이 결성되었는데 수등정웅은 고문으로 참여하였다.
네번째, 지원병후원회
일제는 전투에 부족한 군인을 보충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지원병으로 끌여들였다. 일왕을 위해 목숨을 바쳐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황국신민으로서 영광이라고 설파하며 독려하였다. 부천에 1939년 2월 지원병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수등정웅은 부회장을 맡았다.
다섯번째, 소사지주회
일제는 1920년 대부터 1940년대까지 조선을 일본의 식량 기지로 활용하였다. 즉, 부족한 식량을 조선에서 일본으로 강제로 가져간 것이다. 산미증식계획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는데 1940년에는 소사지주회를 조직하여 영농법 개선, 우량 소작인 표창, 벼 타작의 적적성, 건조, 추계 심경, 비료 증산 등을 추진하였다. 회장으로서 활동하였다.
여섯번째, 면협의원
면협의원은 면장을 자문하고 지방행정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반전농장 주임을 핵심으로 소사면 행정까지 관여하여 일제의 지배가 지역 구석구석까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활동하였다.
위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간이학교는 표면상으로는 농촌을 개발하고 교육시설의 부족을 보충한다는 의미가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일본 정신을 학생들에게 주입하고 직업에 대한 관념을 깊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도한 착취와 수탈은 소작인들의 반발을 불러오는데 수등정웅이 앞장서서 이러한 부작용을 막은 것이다.
수등정웅을 통해 부천 부평평야에 있었던 한다농장과 그 곳에서 소작을 했던 우리 선조들과 자녀들의 교육을 알 수 있다. 일종의 식민지배의 한 단면이 소사간이학교인 것이다. 부천 역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소사간이학교에 대해 시민들에게 많이 알려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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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의 항일독립운동을 기념하고 일제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역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약사로서 한약 처방, 야생화, 한약재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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