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 중동에는 소사간이학교가 있었다

설립자 수등정웅(須藤正雄)은 한다농장 지배인으로 조선총독부 정책을 소사에 펼친 인물

등록 2026.06.26 17:00수정 2026.06.2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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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병합된 후 우리 선조들의 삶은 단순히 식민지배를 받으며 식량수탈만 당한 게 아니었다. 정치사회적 자유 뿐만아니라 제대로 교육을 받을 권리 또한 빼앗겼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부터 우리 민족은 자녀들의 교육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인간의 본성을 깨닫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배움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00여년 전 부천의 교육은 어떠하였을까? 일제에 의해 펼쳐진 교육 정책에 대해 살펴보고 특히 공립보통학교와 함께 초등교육기관으로써 교육을 담당했던 소사간이학교에 대해 알아보고자한다.

부천지역 교육기관의 설립과 운영

일제강점기 부천(현재 부천시 관내)에는 총3개의 교육기관이 있었다. 일본인 자녀의 교육을 담당했던 소사심상소학교는 1913년 6월 4일 설립되었으며, 조선인 자녀의 교육을 담당하는 소사공립보통학교는 1924년 6월 6일 설립되었다. 그리고 현재 오정구에 해당되는 지역의 교육을 담당했던 오정공립보통학교는1931년 9월 16일 설립되었다.

소사심상소학교와 소사공립보통학교는 소사역(현 부천역) 남부인 심곡리에 만들어졌으며, 이 당시 소사역 부근은 계남면사무소, 소사신사, 우편소, 경찰관주재소 등 조선총독부의 통치기관이 모여있는 행정과 경제의 중심지였다. 소사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수가 많았으며 그로 인해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교육기관이 일찍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우리 조선인들을 위한 교육기관은 늦게 만들어졌으며, 학생을 충분히 수용할 수 없을 만큼 학급 수가 적었다.

1930년 6월 발행(소장처-종로도서관)된 <부천군 군세일반>에 의하면 부천군에는 소학교가 1개 있었으며 남학생 48명과 여학생 33명이 다녔으며, 보통학교는 7개소로 남학생 1,485명과 여학생 187명이 다녔다. 이외에도 사립인 일반학교 1개소에 남학생 85명과 여학생 8명, 서당에 남학생 884명과 여학생 56명이 다니고 있었다. 총 2,786명으로 상대적으로 남성에 비해 여성 수가 현격히 적었다는 것과 사설인 서당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사간이학교 설립 과정


소사간이학교는 한다농장(半田農場)의 주임이었던 수등정웅(須藤正雄)이 만들었다. 한다농장은 1930년 경기도 부천군 계남면 중리 3-1에 설립된 농장으로 1936년 부평수리조합 사업구역 내에 일천정(一千町)의 농지에 일천(一千)의 소작인이 있는 대농장이었다.

소사간이학교는 1938년 5월 2일 입학식을 하고, 6월 2일 오전 10시 개교했는데 그 과정이 꽤 오래 걸렸다. 1930년 말에 수등정웅은 농장의 소작인 자녀들을 위해 야학을 설치하였으며, 1932년 4월에 야학을 주학(晝學)으로 고치고 명칭을 언문강습기(諺文講習氣)로 하여 농장부장이었던 이만섭(李萬燮)씨를 교원으로 채용했다. 1936년 허가없는 강습소라 하여 폐교를 당하였으며, 이듬해에 수등정웅은 학교 건물, 학용품, 실습지 등을 갖추어 간이학교로 바꾸었다. 그리고 1938년 4월 천엽교장(千葉校長)과 백태현(白台鉉) 훈도가 와서 5~6월에 입학식과 개교식을 할 수 있었다.


1938년 6월 4일 조선일보 기사 소사간이학교(素砂簡易學校)가 1938년 5월 2일 입학, 6월 2일 개교했으며 군수 대리 이하 다수 내빈과 삼십육명 아동 학부형 등이 참석하여 성대히 이루어졌다고 전하고있다.
▲1938년 6월 4일 조선일보 기사 소사간이학교(素砂簡易學校)가 1938년 5월 2일 입학, 6월 2일 개교했으며 군수 대리 이하 다수 내빈과 삼십육명 아동 학부형 등이 참석하여 성대히 이루어졌다고 전하고있다. 네이버라이브러리

한다농장 주임으로 소작인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간이학교를 설립한 수등정웅은 칭찬 받을 만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동아일보는 수등정웅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동 회사의 지배인으로 농장 총통인 수등정웅씨는 37의 청년으로 소성이 명쾌한데 농촌 정황에 정통하야 빈약을 죄악시 하지 않는 종교인이다. 씨의 철저히 양휘하는 부덕은 20년간에 효성같이 빛나고 있으니 어려운 일이다. 일천의 소작인이 이구동성으로 씨를 찬한다. 씨는 800여원을 드려서 30평의 교사를 짓고 강사 1인을 제공하야 부근 빈가 자녀를 교양하니 참 희한한 일이다. 일반은 감하(感賀)가 많다.
출처: 1936년 8월 5일 동아일보

하지만 부천 소사에서 활동했던 수등정웅의 행적을 보면 간이학교가 단순히 교육만을 위한 것이아니라 일제의 농지 침탈과 소작인으로 전락한 조선인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수등정웅은 그 당시 소사에서 활동한 일본인들 중에 일명 마당발이었다. 참여한 단체와 활동내용이 화려하다.

첫번째, 소사재향군인분회장

1937년 수등정웅은 소사재향군인분회장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1937년 일제의 침략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지원병을 모집하였는데 부천에서 모집된 조선인들은 소사신사에 참배하고 소사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소사재향군인분회장으로서 수등정웅은 이러한 행사를 주관하였다.

두번째, 부천군사후원연맹

조선총독부는 1937년 8월 9일 비상시국을 맞이하여 일본군들의 분투에 감사하여 무운장구를 기원하기 위해 부천군사후원연맹을 결성하였다. 수등정웅은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세번째, 오정방공단

일제의 침략 전쟁은 한반도를 안전지대에서 전쟁이 발생할 수 있는 지역으로 만들었다. 하늘을 통해 전투기가 침범하여 폭탄을 투하할 수 있어 일제는 방공단을 만들었다. 1938년 10월 오정방공단이 결성되었는데 수등정웅은 고문으로 참여하였다.

네번째, 지원병후원회

일제는 전투에 부족한 군인을 보충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지원병으로 끌여들였다. 일왕을 위해 목숨을 바쳐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황국신민으로서 영광이라고 설파하며 독려하였다. 부천에 1939년 2월 지원병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수등정웅은 부회장을 맡았다.

다섯번째, 소사지주회

일제는 1920년 대부터 1940년대까지 조선을 일본의 식량 기지로 활용하였다. 즉, 부족한 식량을 조선에서 일본으로 강제로 가져간 것이다. 산미증식계획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는데 1940년에는 소사지주회를 조직하여 영농법 개선, 우량 소작인 표창, 벼 타작의 적적성, 건조, 추계 심경, 비료 증산 등을 추진하였다. 회장으로서 활동하였다.

여섯번째, 면협의원

면협의원은 면장을 자문하고 지방행정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반전농장 주임을 핵심으로 소사면 행정까지 관여하여 일제의 지배가 지역 구석구석까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활동하였다.

위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간이학교는 표면상으로는 농촌을 개발하고 교육시설의 부족을 보충한다는 의미가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일본 정신을 학생들에게 주입하고 직업에 대한 관념을 깊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도한 착취와 수탈은 소작인들의 반발을 불러오는데 수등정웅이 앞장서서 이러한 부작용을 막은 것이다.

수등정웅을 통해 부천 부평평야에 있었던 한다농장과 그 곳에서 소작을 했던 우리 선조들과 자녀들의 교육을 알 수 있다. 일종의 식민지배의 한 단면이 소사간이학교인 것이다. 부천 역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소사간이학교에 대해 시민들에게 많이 알려졌으면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콩나물신문에도 실립니다.
#소사간이학교 #한다농장 #부평평야 #수등정웅 #농장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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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의 항일독립운동을 기념하고 일제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역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약사로서 한약 처방, 야생화, 한약재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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