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미지 식물원 선인장 정원은 사막이라고 말하는 로리
신혜솔
식물원을 나와 요트를 타러 갔지만 이미 출항 시간이 지나 있었다. 하루를 더 기다리면 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다음 날은 높은 파도 때문에 아예 운항이 취소됐다. 손자에게 미안해졌다. 제주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정작 로리는 아무렇지 않았다.
"내일 또 하면 되지."
아이의 그 한마디에 오히려 위로를 받고 있었다.
다른 풍경 속에서 살아보는 평소의 시간
비가 가장 많이 내리던 날에는 삼매봉도서관으로 갔다. 여행지에서 웬 도서관인가 싶었지만 로리는 어린이 열람실에서 책을 열 권이나 골라와 읽어 달라고 했다. 책을 읽고 독서일기를 쓰는 동안 창밖에서는 빗소리가 잔잔하게 이어졌다. 그 순간 깨달았다. 여행은 꼭 새로운 것을 하는 시간이 아니라, 평소의 시간을 다른 풍경 속에서 살아보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도서관 앞 작은 식당에서 먹은 돈가스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유명한 맛집은 아니었지만 로리는 한 접시를 깨끗이 비우며 말했다.
"할머니! 진짜 맛있어."
배가 고팠는지 맛있게 먹는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웠지만, 손이 많이 가는 다섯 살이라 힘에 부치기도 했다. 여행과 육아의 감각이 묘하게 어우러진 하루하루가 여행지라서 외려 좋았는지도 모른다.
도서관 옆에는 기당미술관이 있었다. 제주를 대표하는 화가 변시지 탄생 100주년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로리의 손을 잡고 그림을 보러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거센 바람을 견디는 말, 쓰러질 듯한 초가집, 끝없이 이어지는 제주 바다, 성산일출봉과 한라산. 그림 속에는 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작품을 한 점 한 점 따라가다 보니 문득, 사람도 여행도 바람 없이 깊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풍경보다 사람이 더 좋은 아이
미술관을 나왔을 때 신기하게도 비가 잠시 멎었다. 반가운 마음에 로리의 손을 잡고 뛰었다. 로리는 신나서 소리를 지르며 따라 뛰었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공원이 보여 그 안으로 들어섰다. 올레길 표식인 리본이 붙어있었다. 하얀 리본과 핑크색 리본이 함께 붙어 있는 길쪽으로 걸으며 로리에게 말했다.
"지금부터는 길을 걷는 거야. 제주도 올레길을 걸어보는 거야."
그렇게 하영올레 길을 잠시 걸을 수 있었다. '하영'은 제주말로 '많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많이 걷고, 많이 만나고, 많이 바라보라는 길. 칠십리공원을 지나 천지연폭포 물소리를 들으며 서귀포항까지 걸었다. 잠수함은 높은 파도 때문에 또 결항이었다. 세연교 위에서는 바람이 몸을 밀어낼 만큼 거셌다. 그래도 다리를 건너보자고 했더니 아이는 좋아라 부추겼다. 로리는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웃으며 달렸다.
"할머니! 나 날아갈 것 같아. 바람이 나를 밀고 있어요!"
비는 다시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지만 관광지가 아닌 우리만의 놀이터에 와 있는 듯했다. 로리는 외국인만 만나면 달려가 묻지도 않는데 자기소개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I'm Rory. I'm five years old!"
유치원에서 배운 서툴지만 귀여운 인사를 끊임없이 건넸다. 사람들은 모두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고, 로리는 세상을 다 얻은 얼굴로 내 손을 다시 잡았다. 손자 로리는 풍경보다 사람이 더 중요한 아이임을 매번 느낀다.
여행 마지막 날 밤, 짐을 싸기 시작하자 로리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할머니, 열 밤만 더 자고 가면 안 돼?"
엄마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열 밤만 더 자고 가겠다며 조르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면서도 마음 한쪽이 뭉클했다. 제주에는 계속 비가 내리는데도 아이는 떠나기 싫다고 울고 있었다. 이 곳에서의 시간이 무척 좋았던 모양이다.
회색 구름 너머가 건넨 선물
돌아가는 날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공항에 도착해 짐을 맡긴 뒤 택시를 타고 자연사박물관으로 향했다. 거대한 참고래 골격 앞에서 로리는 한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자연사박물관에서 궁금한 것이 많고 호기심이 많아서 흥미로웠던 시간
신혜솔
"흰수염고래는 지금도 살아 있어요?"
제주도가 만들어지는 영상을 보며 또 물었다.
"저 때 공룡들은 다 어디 갔어?"
비도 아이의 호기심까지 막지는 못했다. 오히려 비 덕분에 한 곳에 오래 머물렀고, 하나를 깊이 바라볼 수 있었다.
일정을 모두 마치고, 저녁 7시가 넘어 출발한 비행기가 구름을 뚫고 올라간 순간이었다. 회색 구름 너머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노을 속으로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주에서는 끝내 맑은 하늘을 만나지 못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마주한 붉은 노을은 며칠 동안 눅눅했던 마음을 곱게 물들여주는 선물 같았다.
돌아와 생각해 보니 기다리던 맑음은 하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비 덕분에 손자와 더 많이 이야기했고, 더 오래 투닥거렸고, 더 자주 웃었다. 첫날 길을 건너던 달팽이처럼 우리도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여행을 건넜다.
"제주도 여행 어땠어?" 엄마가 로리에게 물었다.
아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열 밤 더 있고 싶었어."
그 한마디면 이번 여행은 충분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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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열 밤 더 있고 싶다" 외친 손자, 이 여행의 비결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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