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공장이 사라지고 남은 얼굴들>
오월의봄
"투쟁이라는 것은 나를 위해서 싸우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내 동료를 위해서 싸우는 과정이었습니다. 내 곁의 사람을 깊이 사랑하지 않으면 아예 불가능한 싸움이에요.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투쟁입니다." (최윤미 전 금속노조 한국와이퍼분회장)
책은 작은 체구를 가진 젊은 여성, 당시 입사한 지 겨우 2년밖에 되지 않았던 최윤미 전 분회장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사측이 일방적으로 내린 결정과 지표를 일러주던 것이 당연하던 노사협의회 자리에서, 모두가 침묵할 때 '만족할 수 없는 임금 인상'이라는 불편한 화두를 던졌던 이가 바로 그녀였다. 그해 겨울, 여느 때처럼 직장과 반장들이 줄줄이 후보로 나선 노측 위원장 선거에서 누군가 최윤미의 이름을 불렀고, 그녀는 가장 많은 표를 얻으며 위원장이 되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다른 노동조합으로부터 "왜 조합원들의 분노를 더 끌어올리지 않느냐"는 비판을 받았다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한국와이퍼 노동자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이들은 분노를 극대화하는 방식보다 서로를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오래 싸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가야 한다는 젊은 동료들의 짐을 대신 짊어지며 "내가 한 번 더 갈게"라며 손을 내밀던 여성 조합원들, 미안한 마음에 먼 길을 돌아 밥값을 건네러 오던 동료. 이 단단한 유대는 억압적인 규율이나 벌금 따위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지독한 신뢰와 사랑으로 지탱 되는 세계였다.
심지어 끝까지 남지 못하고 떠나간 99명의 동료를 두고도 그들은 "그 엄혹한 생계의 무게를 알기에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떠난 이들의 선택마저 품어 안는 그 광활한 마음의 품 앞에서, 내가 가졌던 투쟁에 관한 얄팍한 편견들은 소리 없이 바스러졌다.
결국 일터는 사라졌다. 노동자들은 다시 생계를 위해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누군가는 다른 공장으로, 누군가는 요양보호사나 청소 노동자로, 또 누군가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투쟁의 과정에서 체득한 사랑의 DNA는 사라지지 않았다.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진 그것은 새로운 삶의 자리마다 내려앉아 다시 뿌리를 내렸고, 차가운 일터에서 마주한 현실 속에서도 노동자들은 한국와이퍼 시절의 다정한 관계를 그리워하며 서로를 찾는다.
그들이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
그들의 투쟁 과정에서 모인 연대기금 다른 씨앗이 되었다. 그렇게 '뚜벅이재단'이 설립됐다. 뚜벅이재단은 해고 노동자와 취약 노동자의 고용 안정과 권익 증진을 지원하며, 노동자들이 서로를 돌보는 울타리가 되고 있다.
처음에 나는 <공장이 사라지고 남은 얼굴들>이라는 제목을 하나의 은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북토크가 끝난 뒤 이 문장은 현실에 더 가까운 표현으로 다가왔다. 공장이 사라진 자리에서 끝내 남은 것은 생산 설비도, 기업의 이름도 아니었다. 함께 밥을 나누고 웃고 울었던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효율과 속도가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어가는 시대에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서로를 살게 하는 힘은 결국 사람에게서 나온다. 북토크에 가기 전까지 노동조합은 내게 다소 낯설고 먼 세계였다.
하지만 그날 내가 마주한 노동자들의 얼굴은 분노보다 돌봄을, 경쟁보다 연대를, 투쟁보다 사랑을 먼저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이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은 단순한 일자리만이 아니라, 서로를 귀하게 돌보는 인간다운 삶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공장이 사라지고 남은 얼굴들 - 흩어지지 않은 노동자들은 무엇을 만들었나
희음 (지은이), 재단법인 노동존중 세상을 향한 우직한 걸음 뚜벅이 (기획),
오월의봄,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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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공장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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