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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공장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

    투쟁에 대한 편견이 소리 없이 바스러진 날... 책 <공장이 사라지고 남은 얼굴들> 북토크 참관기

    등록 2026.06.29 16:00수정 2026.06.2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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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조, 연대, 머리띠를 둘러맨 투쟁의 현장을 떠올릴 때, 대개 떠오르는 것은 붉은 분노의 이미지다. 확성기를 타고 흐르는 날 선 구호들, 굳게 다문 입술, 타협 없는 외침. 노동조합의 파업은 내게 늘 한 발짝 떨어진 곳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매일 스쳐 지나가는 뉴스 화면처럼, 그저 세상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었다.

    그러던 지난 18일 저녁, 노동자의 인권에 관심이 많은 친구를 따라 우연히 책 <공장이 사라지고 남은 얼굴들>의 저자 희음의 북토크에 참여하게 됐다. 이 책은 일본의 거대 자동차 부품 기업 덴소(DENSO) 그룹의 투자로 설립된 한국와이퍼(안산 반월공단)가 일방적으로 청산과 해고를 통보하자, 이에 맞선 209명의 노동자들이 함께 만들어낸 투쟁과 돌봄, 그리고 연대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이 책과 북토크를 통해 나는, 기존의 문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언어의 투쟁을 목격했다. 그것은 어쩌면 뜬금없는 감정, 투쟁과는 멀어 보이는 부조화의 언어, '사랑'이었다.

     책 <공장이 사라지고 남은 얼굴들> 북토크 현장, 희음 작가(왼), 최윤미 前한국와이퍼분회장(오)
    ▲ 책 <공장이 사라지고 남은 얼굴들> 북토크 현장, 희음 작가(왼), 최윤미 前한국와이퍼분회장(오) 이보슬

    밥을 짓고 안부를 묻는, 거룩한 '살림의 투쟁'

    "나 혼자 잘 살겠다는 게 아니라 같이 잘 살겠다는 의미... 한 사람을 위한 싸움 같지만 사실은 주변 사람을 위한 싸움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필연적으로 '살리는 일', 즉 '살림의 투쟁'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록자 희음)

    한국와이퍼 노동자의 다수는 오랜 세월 생산라인을 지켜온 중년 여성들이었다. 일방적인 공장 청산이라는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이 1년 넘게 청산 철회와 고용 보장을 위한 투쟁을 이어갈 수 있었던 힘은 거창한 이념이나 영웅적 희생에서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를 돌보는 일상의 감각에서 비롯됐다.

    그 돌봄은 가장 먼저 밥상 위에서 드러났다. 점거 투쟁 현장은 뜻밖에도 '먹는 이야기'로 가득했다. 새벽 공기를 뚫고 나와 서로를 위해 밥을 짓고, 공장 문밖의 이웃들은 끊임없이 음식을 보내왔다. 고립과 불안이 일상이 된 상황에서 따뜻한 밥 한 끼는 서로의 무너지는 마음을 붙잡아주는 가장 강력한 버팀목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오늘 컨디션은 어때?", "어디 아픈 곳은 없어?"라며 끊임없이 안위를 물었다. 집안의 불을 밝히고 가족을 먹여 살리던 '살림'의 감각이 거친 투쟁의 현장에서 고스란히 재현된 것이다. 그 지극한 돌봄이 있었기에 벼랑 끝에 선 조합원들의 얼굴에는 늘 에너지가 넘쳤고, 고난 속에서도 온기가 흘렀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던 싸움


     책 <공장이 사라지고 남은 얼굴들>
    ▲ 책 <공장이 사라지고 남은 얼굴들> 오월의봄

    "투쟁이라는 것은 나를 위해서 싸우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내 동료를 위해서 싸우는 과정이었습니다. 내 곁의 사람을 깊이 사랑하지 않으면 아예 불가능한 싸움이에요.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투쟁입니다." (최윤미 전 금속노조 한국와이퍼분회장)

    책은 작은 체구를 가진 젊은 여성, 당시 입사한 지 겨우 2년밖에 되지 않았던 최윤미 전 분회장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사측이 일방적으로 내린 결정과 지표를 일러주던 것이 당연하던 노사협의회 자리에서, 모두가 침묵할 때 '만족할 수 없는 임금 인상'이라는 불편한 화두를 던졌던 이가 바로 그녀였다. 그해 겨울, 여느 때처럼 직장과 반장들이 줄줄이 후보로 나선 노측 위원장 선거에서 누군가 최윤미의 이름을 불렀고, 그녀는 가장 많은 표를 얻으며 위원장이 되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다른 노동조합으로부터 "왜 조합원들의 분노를 더 끌어올리지 않느냐"는 비판을 받았다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한국와이퍼 노동자들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이들은 분노를 극대화하는 방식보다 서로를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오래 싸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가야 한다는 젊은 동료들의 짐을 대신 짊어지며 "내가 한 번 더 갈게"라며 손을 내밀던 여성 조합원들, 미안한 마음에 먼 길을 돌아 밥값을 건네러 오던 동료. 이 단단한 유대는 억압적인 규율이나 벌금 따위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지독한 신뢰와 사랑으로 지탱 되는 세계였다.

    심지어 끝까지 남지 못하고 떠나간 99명의 동료를 두고도 그들은 "그 엄혹한 생계의 무게를 알기에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떠난 이들의 선택마저 품어 안는 그 광활한 마음의 품 앞에서, 내가 가졌던 투쟁에 관한 얄팍한 편견들은 소리 없이 바스러졌다.

    결국 일터는 사라졌다. 노동자들은 다시 생계를 위해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누군가는 다른 공장으로, 누군가는 요양보호사나 청소 노동자로, 또 누군가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투쟁의 과정에서 체득한 사랑의 DNA는 사라지지 않았다.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진 그것은 새로운 삶의 자리마다 내려앉아 다시 뿌리를 내렸고, 차가운 일터에서 마주한 현실 속에서도 노동자들은 한국와이퍼 시절의 다정한 관계를 그리워하며 서로를 찾는다.

    그들이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

    그들의 투쟁 과정에서 모인 연대기금 다른 씨앗이 되었다. 그렇게 '뚜벅이재단'이 설립됐다. 뚜벅이재단은 해고 노동자와 취약 노동자의 고용 안정과 권익 증진을 지원하며, 노동자들이 서로를 돌보는 울타리가 되고 있다.

    처음에 나는 <공장이 사라지고 남은 얼굴들>이라는 제목을 하나의 은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북토크가 끝난 뒤 이 문장은 현실에 더 가까운 표현으로 다가왔다. 공장이 사라진 자리에서 끝내 남은 것은 생산 설비도, 기업의 이름도 아니었다. 함께 밥을 나누고 웃고 울었던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효율과 속도가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어가는 시대에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서로를 살게 하는 힘은 결국 사람에게서 나온다. 북토크에 가기 전까지 노동조합은 내게 다소 낯설고 먼 세계였다.

    하지만 그날 내가 마주한 노동자들의 얼굴은 분노보다 돌봄을, 경쟁보다 연대를, 투쟁보다 사랑을 먼저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이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은 단순한 일자리만이 아니라, 서로를 귀하게 돌보는 인간다운 삶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공장이 사라지고 남은 얼굴들 - 흩어지지 않은 노동자들은 무엇을 만들었나

    희음 (지은이), 재단법인 노동존중 세상을 향한 우직한 걸음 뚜벅이 (기획),
    오월의봄, 2026


    #한국와이퍼 #노동조합 #희음 #북토크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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