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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악마가 사랑한 천국'

[돌로미티 여행기 3] 트레치메 한 바퀴 돌며 억겁의 시간 속 인간 존재 묵상

등록 2026.07.06 10:41수정 2026.07.06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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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주오이 벤치에서 친구들이 의자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라가주오이 벤치에서 친구들이 의자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이희용
[관련기사]
- '숨은 보석'에서 한국인 걷기 성지로 바뀐 이탈리아 돌로미티 (https://omn.kr/2iwqn)
- 돌로미티 걷기, 날마다 '최고 기록'을 경신하는 풍경 (https://omn.kr/2ix6a)

6월 22일 목적지는 라가주오이(2778m)와 친퀘토리(2361m)다. 나흘쯤 둘러봤으면 이제 눈앞의 풍경이 식상해질 만도 한데 돌로미티는 추호도 그런 느낌을 허용하지 않는다. 볼 때마다 새롭고 신비스럽고 경이롭다.


라가주오이는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진 돌로미티의 산맥과 계곡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상부 승강장에 내려 20여 분만 걸으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1차대전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참호나 포탄피 등이 많이 남아 있다. 지형이 너무 험악해 이탈리아군이나 오스트리아군이나 참 고생스러웠을 듯하다.

돌로미티 다른 곳도 그렇듯이 산장 앞에는 이탈리아 국기인 녹·백·적의 세로 삼색기가 펄럭이지만 트레일 주변의 바위 곳곳에는 오스트리아 국기인 적·백·적 가로 삼색 문양이 그려져 있다. 오스트리아 땅이던 돌로미티가 1차대전 후 이탈리아 영토로 편입됐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나 스페인 등지의 웬만한 산 정상은 모두 골고다 언덕인 것처럼 십자가나 십자고상을 세워놓았다. 라가주오이 십자가는 오스트리아 전몰장병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놓았다니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이토록 아름다운 경치 속에서 젊은 병사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아까운 목숨을 바쳐야 했을까.

친퀘토리 절경 5개의 돌탑으로 이뤄진 친퀘토리.
▲친퀘토리 절경 5개의 돌탑으로 이뤄진 친퀘토리. 이희용

산장에서 스파게티로 점심을 먹고 나서 케이블카로 내려간 뒤 버스로 이동해 친퀘토리 트레킹에 나섰다. 이번엔 리프트를 타고 올라간다. 친퀘토리는 '5개의 탑'이란 뜻이지만 실제로는 더 많다. 암벽을 오르는 클라이머들도 눈에 띈다.

돌탑 반대편의 아베라우 산장까지는 가파른 돌길 오르막이다. 숨이 가빠지지 않도록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가끔씩 멈춰 주위를 돌아보니 풍경화 속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경치가 빼어나다. '악마가 사랑한 천국'이란 표현이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산장에서 일행 대부분이 맛 좋기로 유명하다는 에스프레소 커피를 한 잔씩 마신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나는 심호흡으로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다.


내가 잘 아는 후배이자 친척 동생이 자기도 가족과 함께 돌로미티에 왔다는 문자를 보내온다. 대학 학과 선배와 언론계 후배에 이어 세 번째 소식이다. 비록 마주치지는 못했지만 같은 시간 돌로미티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인연으로 여겨진다. 근덕이는 오늘 아는 후배 가족과 세 차례나 마주쳤다. 돌로미티가 한국인에게 인기 폭발 중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코르티나담페초의 퓨전 일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다. 일행 가운데 한 부인이 오늘 환갑날이라고 하며 음료 비용을 내겠다고 한다. 축하 인사가 쏟아진다. 돌로미티에서 맞는 회갑이라니 멋지다. 지난해 아내 회갑날 어떻게 기념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돌로미티의 심장' 트레치메의 위용

가까워진 트레치메 제3산장을 지나 반시계 방향으로 돌다 보면 트레치메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가까워진 트레치메 제3산장을 지나 반시계 방향으로 돌다 보면 트레치메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이희용

이탈리아 입국 이레째이자 트레킹 마지막 날이다. '돌로미티의 심장'이라는 트레치메를 보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트레치메는 세 봉우리란 뜻이지만 부산 이기대 앞바다 오륙도처럼 보는 방향에 따라 네 개로도 보이고, 자세히 보면 다섯 개, 여섯 개, 일곱 개 혹은 그 이상으로도 늘어난다.

가는 중간에 텐트촌이 보인다. 좀 불편하긴 하겠지만, 텐트 속에서 노을을 감상한 뒤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다가 잠이 들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어 부러워진다. 평일인데도 진입로와 주차장이 붐빈다. 올 성수기에는 예약 전쟁, 주차난, 교통체증이 극심할 듯하다.

아우론조 산장(2320m, 편의상 제1산장)에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여기서도 높이 솟은 바위 봉우리가 압도적인 광경을 연출하지만 세 봉우리의 정면은 라베레도 산장(2344m, 제2산장)을 지나 가파른 고개에 오른 다음부터 볼 수 있다. 각국에서 몰려든 하이킹족이 장사진을 이룬다. 한국인이 절반 가까이 되는 듯 곳곳에서 귀에 익은 언어가 들려온다.

동굴에서 바라본 트레치메 1차대전 때 참호용으로 뚫어놓은 동굴 안에서 트레치메를 바라보면 이처럼 환상적인 경관을 자아낸다.
▲동굴에서 바라본 트레치메 1차대전 때 참호용으로 뚫어놓은 동굴 안에서 트레치메를 바라보면 이처럼 환상적인 경관을 자아낸다. 이희용

2시간쯤 걸으니 로카텔리 산장(2450m, 제3산장)이 나온다. 인근 언덕에는 유명한 동굴 사진 스폿이 있다. 1차대전 때 참호용으로 만들어놓았다고 한다. 길이 가파르고 미끄러워 오르내리기 쉽지 않다. 우리 같으면 나무 덱이나 철제 계단을 만들어놓았을 텐데. 태성이가 "이곳 공무원들은 영 일을 안 하네"라고 한마디 던진다. 동굴 안에서 바라보는 트레치메의 풍경은 환상적이다.

일행 18명 가운데 B조 8명은 이곳에서 점심 먹고 왔던 길을 되짚어 아우론조 산장으로 간다. 우리 친구 10명 가운데 5명이 B조에 끼었다. 나를 포함한 A조 10명은 트레치메를 반시계 방향으로 빙 도는 길을 택했다. 말가 랑아름 식당에 들러 마카로니 스파게티로 간단하게 점심을 먹은 뒤 다시 길을 나선다.

가까이서 보는 트레치메는 세월이 빚어낸 풍화작용 과정을 잘 보여준다. 무한한 우주의 점에 불과한 지구 안에서 한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억겁의 시간 속에서 100년도 못 되는 우리 인생이 얼마나 짧은 순간인지 잠시 묵상한다. 오늘 트레킹은 걸으며 참선하는 행선(行禪)이다.

오늘도 날씨는 좋다. 비 예보는 늘 있었으나 사소룽고 걸었을 때 말고는 늘 하산 후에 만났다. 복 받은 팀이다.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하얗다. 햇빛은 따갑지만 바람은 삽상해 걷기에 딱이다. "굽이굽이 산길 걷다 보면 한발 두발 한숨만 나오네"라는 노랫말의 '삼포 가는 길'을 흥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긴다.

카디니 디 미주리나 능선 트레치메 관문인 아우론조 산장(제1산장)에서 바라본 카디니 디 미주리나 능선.
▲카디니 디 미주리나 능선 트레치메 관문인 아우론조 산장(제1산장)에서 바라본 카디니 디 미주리나 능선. 이희용

한 바퀴 다 돌고 나서도 B조가 도착하지 않아 나와 몇몇 친구는 공룡능선 닮은 카디니 디 미주리나 능선이 잘 보이는 산장 맞은편 초원에 누워 멍하니 상념에 잠긴다. '한계령', '그리운 금강산', '산유화', '봄이 오면' 등 산에 얽힌 노래도 부른다. 참 행복한 시간이다.

여기서도 사소한 사달이 있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누군 등산용 스카프를 어디에 떨궜는지 모른다고 하고, 누군 선글라스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트레치메에 와서 집단 치매 증상이라도 보이는 건가? 이탈리아 남부와 달리 북부에서는 소매치기 걱정을 안 해도 된다고 했더니, 누가 훔쳐 가지 않아도 스스로 흘리고 다닌다.

돌로미티의 진주 브라이에스 호수. 보트를 타기도 하고 수영도 한다.
▲돌로미티의 진주 브라이에스 호수. 보트를 타기도 하고 수영도 한다. 이희용
호숫가의 여정 브라이에스 호수 둘레길을 돌다가 잠시 호수를 바라보고 있다.
▲호숫가의 여정 브라이에스 호수 둘레길을 돌다가 잠시 호수를 바라보고 있다. 이희용

버스를 타고 '돌로미티의 진주'로 불리는 브라이에스 호수로 옮겨갔다. 카레차 호수보다 몇 배는 넓어 보인다. 보트도 타고 수영도 한다. 나도 친구들과 모처럼 보트를 타보려다가 30분이나 대기해야 한다기에 그냥 호수 둘레길을 걷고 말았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둘레가 꽤 길고 비탈길도 있어 막판에는 종종걸음을 해야 했다.

셰익스피어 덕분에 먹고사는 베로나

베로나 아레나 고대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베로나 원형 경기장. 지금도 오페라 공연장 등으로 쓰이고 있다.
▲베로나 아레나 고대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베로나 원형 경기장. 지금도 오페라 공연장 등으로 쓰이고 있다. 이희용

이제 마지막 날이다. 코르티나담페초 숙소를 떠나 베로나로 향한다. 차창 밖으로 암봉들이 스쳐 지나간다. 언제 또 돌로미티를 올 수 있을지 세월이 야속하게 느껴진다. 또 오고 싶지만, 못 가본 데도 많고, 지금처럼 걸을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갑자기 우울해진다.

베로나에 도착했다. 20여 년 만에 다시 찾은 도시다. 원형경기장 아레나를 지나 줄리엣의 집에 도착했다. 예전에는 줄리엣의 방에 들어갈 때만 입장료를 받았는데, 지금은 정원에 들어갈 때부터 12유로 티켓을 끊어야 한다. 실존 인물이 실제 살던 집도 아니고 딱히 볼 것 없는데도 사람이 북적인다. 스토리의 힘이다. 줄리엣 무덤까지 만들어놓고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으니 말 다했다. 베로나 관광업자들은 이곳에 와보지도 않은 채 이곳을 무대로 희곡을 쓴 셰익스피어 송덕비라도 세워줘야 할 듯하다.

로미오와 줄리엣 가운데 누가 더 오래 살았는지 친구들에게 문제를 냈다. 다들 희곡의 클라이맥스 대목을 떠올리며 누가 나중에 죽었는지 골똘히 생각한다. "로렌스 신부의 계략에 따라 줄리엣이 약을 먹고 죽은 척하고 있자 로미오가 긴급히 달려와 줄리엣이 숨진 줄 알고 칼로 제 가슴을 찔러 자살하고, 나중에 깨어난 줄리엣도 절망해 뒤따라 죽었으니…더 오래 산 이는 줄리엣!"이라고 말한다. 추리는 정확했지만 정답은 로미오다. 희곡 속 줄리엣은 14세, 로미오는 16세였다.

람베르티 종탑 줄리엣의 집 인근의 람베르티 종탑 꼭대기.
▲람베르티 종탑 줄리엣의 집 인근의 람베르티 종탑 꼭대기. 이희용
종탑에서 내려다본 베로나 시가지 람베르티 종탑에서 내려다본 베로나 시가지. 유럽 중세 도시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종탑에서 내려다본 베로나 시가지 람베르티 종탑에서 내려다본 베로나 시가지. 유럽 중세 도시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이희용

줄리엣의 집은 먼발치에서 인증 샷만 찍었다. 대신 친구 둘과 함께 종탑 람베르티에 올랐다. 여기도 입장료가 6유로다. 비싼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엘리베이터가 있고 조망 풍경도 좋아 흡족하다. 무엇보다 날씨가 더워 걷기가 괴로웠는데 시원해서 마음에 든다.

에르베 광장에서 과일컵 하나씩 사서 들고 주차장으로 향한다. 오늘쯤은 비가 흠뻑 내려도 괜찮을 텐데 여전히 햇빛이 쨍쨍하다.

이제 예정된 모든 일정을 소화했다. 밀라노공항에 도착해 출국 수속을 마쳤다. 5일간 이탈리아를 더 여행하다가 귀국길에 오를 친구 두 명과는 공항에서 작별을 고했다. 연일 트레킹과 음주로 피곤할 텐데, 더위도 심하고 소매치기도 많다는데…. 부러움보다 걱정이 앞선다.

하필 우리가 귀국 비행기를 탄 시간에 월드컵 축구 남아공전이 열린다. 승무원에게 기내 와이파이를 이용해 중계방송을 볼 수 있는지 묻자 SNS 등만 되고 TV 시청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내려서 경기 결과를 확인해 보니 내가 응원을 안 해서 졌나 싶어 안타깝기도 하고, 관전평을 보니 차라리 안 보기를 잘했다는 생각도 든다. 앞으로도 두고두고 돌로미티의 추억과 축구 국가대표팀의 졸전이 계속 겹쳐서 기억날 듯하다.
#돌로미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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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에서 기자 생활을 했으며, 한국언론진흥재단 경영본부장을 지냈습니다. 현재 문화, 미디어, 동포, 다문화 분야에 걸쳐 강연과 글쓰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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