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물관 내부로 들어가기 전에 본 악성 우륵 선생의 연주상.
오순미
유튜브에서 평소 즐겨 듣던 가야금 연주곡 "렛 잇 비 Let it be"를 찾아 틀었다. 묘하게도 우륵이 든 가야금에서 울리는 소리 같았다. 영국 태생 멜로디가 가야금 명주실이 빚어낸 음색에 이토록 자연스럽게 어울리다니. 들을 때마다 낯설지 않은 건 음과 음 사이 여백을 품은 가야금의 힘일 것이다. 마음 깊이 스며드는 둥~기덕의 힘. 연주가 끝날 때까지 그네에 앉아 초록 바람을 바르고선 "렛 잇 비!(순리에 맡기겠어)"를 되뇌며 박물관으로 향했다.
경북 고령 우륵 박물관과 소리 체험관
'우륵 박물관'은 가야금과 우륵, 전통 음악과 현악기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문화 공간이다. 현 박물관 자리도 우륵이 음악 활동을 펼쳤던 장소로 전해진다. 우륵을 배출한 대가야(고령 중심)는 학창 시절 국사 시간에 훑고 지났을 텐데 상세한 내용은 기억에서 잊혔다. 그래도 왕산악(고구려·거문고 제작), 박연(조선·아악 정리)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알려진 우륵만큼은 또렷하다.
소국으로 분열된 가야를 음악으로 통합하려 애쓴 '가실왕(대가야 왕)'은 우륵에게 각 지역의 음악적 특징을 담은 가야금 12곡을 만들게 했다. 우리의 K팝이 국경을 넘어 세계를 잇는 모습을 보면 가야금 12곡으로 결속을 다지려던 가실왕의 구상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나 대통합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조국의 쇠퇴를 감지한 우륵은 가야금을 안고 적국인 신라로 망명한다. 우륵은 신라에서 음악문화 발전에 공헌하며 대가야의 혼을 지켜낸다. 우륵이 가져온 가야 음악은 진흥왕의 문화예술 정책에 힘입어 신라 궁중음악으로 거듭난다. 적국의 문화라고 홀대하지 않은 진흥왕, 위험을 무릅쓰고 투항한 우륵, 두 사람의 혜안 덕분에 우린 지금도 가야금의 섬세한 울림을 누릴 수 있다.
박물관 규모는 크지 않지만 가야금 12곡에 담긴 의미를 비롯해 가야금의 변천사와 재료·제작 과정·주법까지 가야금의 세계를 두루 살필 수 있다. 아정한 음색의 정악 가야금부터 개량된 산조 가야금, 화려한 음색을 지닌 25현 가야금까지 실물을 보며 각각의 특징을 비교할 수 있다. 가야금 형태에 따라 부위별 명칭이 다르다는 점도 흥미롭다. 재료로 쓰이는 오동나무 건조장도 둘러볼 수 있으며 거문고와 해금, 앙금 등 전통악기의 음색도 들어볼 수 있다. 규모는 아담해도 가야금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부족함 없는 공간이다.

▲ 궁중음악에 쓰이는 정악 가야금과 민속악 연주에 쓰이는 산조 가야금.
오순미

▲ 가장 일반적인 국악기의 편성. 거문고, 가야금, 해금, 대금, 세피리, 장구, 앙금.
오순미
전시된 '백제금동대향로'는 예부터 우리 민족이 음악과 춤을 즐겼다는 사실을 알린다. 향로 뚜껑에 표현된 다섯 악사가 그 증거다. 그중 한 악사가 현악기 연주자다. 다섯 악사는 사람과 모든 동식물 위에 배치되어 당시 악사들의 사회적 지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부여 박물관에 진품을 보러 갈 기회가 온다면 알고 보는 유물 탐방이 될 것이다.
박물관을 나오려는데 안내자가 알렸다. 나가서 왼쪽으로 보이는 '소리 체험관'도 거쳐 가라고. 그곳 1층에선 각 나라의 현악기를 볼 수 있으며 악기 소리와 연주 장면까지 감상할 수 있단다.
작년 8월 몽골 여행 때 전통 현악기 마두금의 애절한 선율에 반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마두금도 있으려나 기대했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몽골 유목민의 삶을 표현한 마두금의 깊고 애절한 음색은 여전했다. 외에도 인도 시타르, 미국 애팔래치아 산맥 지역의 애팔래치안 덜시머, 미얀마 사웅가욱, 그리스 리라 등 이름도 낯선 독특한 모양새의 현악기는 관람객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 현악기 종류. 좌측 처음 시타르. 우측 위 가운데 마두금. 우측 아래 끝 애팔래치안 덜시머
오순미
도토리수제비와 대가야 전시관들
박물관을 둘러본 후엔 검색해 알아둔 도토리수제비집으로 떠났다. 홀이 다 찼다며 방으로 안내했다. 허리가 부실해 바닥에 앉는 일이 달갑지 않았지만 도토리수제비가 궁금해 수긍하며 자릴 잡았다.
정식 명칭은 인삼도토리수제비. 한 술 뜬 국물은 진한 약재 향 뒤로 깊은 감칠맛을 남겼다. 소고기 육수에 인삼과 대추, 잣, 은행을 넣고 고기를 듬뿍 담아낸 도토리수제비. 그 사이로 갈빛 수제비가 너울거리며 쫀득한 식감을 더했다.
밥 한 공기까지 기본으로 나오는 도토리수제비 한 그릇이 1만 원. 왠지 수지맞은 기분이었다. 푸짐한 한 그릇에 넉넉한 인심이 담긴 듯해서. 된장에 무친 아삭이고추까지 입안을 홀리는 바람에 보양식을 먹은 듯 몸에 기운이 돌았다.

▲ 첫인상이 한 그릇의 '약' 같았던 인삼도토리수제비.
오순미
때이른 복달임을 한 듯 든든해진 우린 10분 거리에 모여 있는 대가야 역사관·대가야 왕릉전시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왕릉전시관은 고령 지산동에서 발견된 순장 왕릉 제44호분 내부를 실물 크기로 재현한 곳이다. 무덤의 구조와 축조 방식, 부장품을 직접 볼 수 있다. 남편은 적어도 아파트 세 동은 들어설 만한 규모라며 놀랐고, 난 비상식적인 순장 문화에 혀를 차며 전시장을 둘러봤다.

▲ 실물 크기로 재현한 대가야 왕릉전시관 내부
오순미
대가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고령은 그 생활상과 문화를 허투루 다루지 않았다. 정리하고 보존하며 오랜 시간의 깊이를 기억했다. 남겨진 흔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오늘까지 이어온 고령이야말로 '렛 잇 비'를 닮은 도시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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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대가야 지역에서 가야금 소리로 시작한 여름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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