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수도권의 소멸은 총성만 울리지 않았을 뿐, 거대 자본이 모든 피와 땀을 수도권으로 빨아들이며 지역을 서서히 말라 죽게 하는 대단히 폭력적인 '구조적 학살'이다. 당장 상권이 무너지고, 청년들은 쫓기듯 고향을 떠나며, 남겨진 공동체는 철저히 해체된 채 거대한 요양원이자 피눈물 나는 폐허로 변해가고 있다.
이 처참한 붕괴의 벼랑 끝에서 무기력하게 죽어가는 지역을 살리겠다며, 역대 정부와 정치권은 앞다투어 메가톤급 국책사업들을 쏟아냈다. 가덕도신공항이 그랬고, '5극 3특'으로 대변되는 초광역 행정통합 및 메가시티 중심의 교통망 확충 사업들이 그랬다.
필자는 그간 이러한 대규모 토목·행정 중심의 국책사업들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것이 지역에 '경제적 자기 결정권'을 안겨주기는커녕, 종국에는 수도권으로 향하는 수탈의 고속도로를 뚫어주는 기만적 행위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필자가 호남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조성에 대해서만큼은 '지역의 경제적 자기 결정권을 쟁취할 투쟁의 지렛대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하자, 곳곳에서 날 선 질문들이 쏟아진다. "가덕도신공항은 반대하면서 왜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는 긍정하는가?",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역시 지역 토호들의 배만 불리고 생태계만 파괴하는 수탈의 인프라가 되지 않겠는가?"
당연하고도 뼈아픈 지적이다. 단언컨대,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역시 시민의 강력한 통제 권력, 즉 '경제적 자기 결정권'이 개입하지 못한다면, 지역의 갯벌과 전기만 착취당하고 막대한 이윤은 모조리 서울로 빠져나가는 역외유출, 즉 끔찍한 '내부 식민지'의 현장이 될 것임이 자명하다.
하지만 이 '지독한 오해' 앞에서는 부득이,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잣대로 자본이 축적되는 물리적 속성을 서늘하게 갈라치기 할 수밖에 없다. 필자의 기준은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가덕도신공항과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 껍데기만 비슷할 뿐 본질적으로 자본이 축적되는 '공간적 성격'과 '가치 창출의 메커니즘'에서 하늘과 땅 차이이기 때문이다.
유통 자본의 '빨대'인가, 생산 자본의 '요새'인가
가덕도신공항이나 '5극 3특' 같은 대규모 토목 인프라는 무엇인가.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본과 노동이 이동하는 '공간적 마찰 비용'을 지우는 작업이다. 잉여가치를 창출하기보다는, 자본과 상품의 원활한 이동만을 촉진하는 전형적인 '유통 및 순환 자본'의 성격을 지닌다.
즉, 지역의 피와 땀이 서울이라는 거대한 블랙홀로 더 빠르고 매끄럽게 빨려 들어가도록 더 넓은 '빨대'를 꽂아주는 작업이다. 애초에 모든 부가 다 빠져나가도록 설계된 거대한 하수구 구멍에 대고, '시민적 통제'라는 그물을 쳐서 이윤을 지역에 가두겠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낭만이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는 목줄을 채울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전장(戰場)이다. 이것은 스쳐 가는 통로가 아니라, 막대한 잉여가치를 지역이라는 공간 내부에서 직접 뿜어내는 육중한 '고정된 생산수단'이다. 1000조 원 규모의 거대 독점 자본은 비수도권의 막대한 전력과 용수, 넓은 부지 없이는 단 하루도 스스로 굴러갈 수 없다. 필자는 바로 이 지점, 즉 자본이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지역의 공간에 물리적으로 완벽하게 종속되는 그 절박함에 주목하는 것이다.
통제권, 즉 '경제적 자기 결정권'을 쟁취하기 위한 래디컬한 진지전(陣地戰)
자본이 우리 땅에 단단히 발이 묶이는 바로 그 '물리적 볼모성'. 그들이 지역의 자원 없이는 단 1원도 벌어들일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무기력했던 지역이 거대 반도체 자본을 향해 빼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우리는 그 거대한 자본을 인질 삼아야만 비로소 협상 테이블을 뒤엎고 권력을 쥐어짜 낼 수 있다. "우리의 갯벌과 전기를 쓰려거든, 공장에서 창출되는 천문학적 이윤을 무단으로 서울로 빼돌리지 마라. '지역발전 공공기금'에 자금을 예치하여 지역사회를 위해 재투자하고, 녹색 전환(GX)을 법적으로 강제하라."
도망칠 수 없는 거대 생산 자본의 심장에 닻을 내리고, 그 현금흐름을 포획하여 통제하는 것. 그것이 수십 년간 뼈저리게 소외당했던 비수도권이 비로소 실질적인 '경제적 자기 결정권'을 쟁취할 수 있는 유일한 물질적 기반이다.
착취의 '빨대'를 내어주는 것과, 적의 심장을 '인질'로 잡아 통제하는 것을 혼동해선 안 된다. 필자가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를 움켜쥐려는 것은 거대 자본에 대한 순진한 긍정이나 투항이 아니다. 수단이 없어 무기력하게 죽어가던 비수도권이, 괴물의 등에 올라타 자본의 가장 무거운 약점을 멱살 잡아채듯 쥐고 흔들어 기어이 시민적 통제 권력을 주조해 내려는 처절하고도 래디컬한 기획인 것이다.
위험하니 피하자는 관념적 온건주의로는 서서히 조여오는 지역 '소멸'의 시계를 단 1초도 늦출 수 없다. 1000조의 자본이 밀고 들어오는 바로 그 거대한 모순의 한복판, 그 피 튀기는 전장이야말로 지역 인민의 역량을 증명해 낼 역사적 무대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