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강순희 말하고 유시민 듣다.
은빛
어떤 큰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과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정체성이 생긴다. 소소하게는 출산과 육아라는 사건을 통해 '배여진'으로만 살던 나에게도 '○○엄마'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부여되었다.
한국은행을 다니며 부산 범어사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데이트를 하고, 결혼을 해서 소소한 행복과 미래를 꿈꾸던 강순희는 1975년 4월 9일 이후로 '인혁당 유가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생겨버렸다. 1975년 4월 9일 새벽, 대법원 선고가 내려진 지 불과 18시간 만에 8명의 시민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바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다. 그리고 강순희의 남편 우홍선은 8명의 사형수 중 한 명이었다.
책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는 고 우홍선의 아내 강순희가 말하고 작가 유시민이 듣고 정리한 책이다. 강순희의 입으로 풀어낸 강순희의 인생에는 여러 정체성의 강순희가 등장한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장녀 강순희, 피난민 강순희, 직장인 강순희, 사랑에 빠진 강순희, 우홍선의 아내 강순희, 네 자녀의 엄마 강순희, 사형수의 아내 강순희, 싸움꾼 강순희 그리고 노인 강순희. 아흔셋의 순희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지금까지 내 삶은 불행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난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불행 중 가장 큰 불행을 겪으신 것 같은데 불행하지 않았다니. 책을 다 읽고 나니 나 역시 강순희의 삶은 불행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책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는 '사람 강순희'의 인생을 통해 전쟁과 분단의 역사, 뼈아픈 현대사와 민주화의 역사의 흐름을 자연스레 짚어낸다. 하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사람 강순희'의 소소한 삶이다. 사랑이 많으셨던 강순희의 부모님, 하얼빈과 만주, 이북에서의 삶, 피난민으로서의 삶, 옷장사와 보육원 교사, 한국은행 직원 등 돈을 벌던 강순희의 삶, 학교 선생을 꿈꾸던 강순희, 범어사에서 우홍선과 사랑 노래를 주고 받으며 사랑에 빠진 강순희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만 같다. '인혁당 유가족'의 수식어가 빠진 '사람 강순희'의 인생은 시대의 굴곡진 삶이 담겨 있지만 참 달큰한 맛이 난다.
강순희는 '깡'순희이다. 그녀의 '깡따구'가 그를 불행한 삶으로 이끌지 않았던 것 같다. 남편의 무덤 앞에서, 그리고 집 대문을 열고 "박정희는 살인마다!"라고 외치고, 남편이 죽고 정권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 신고하지 못해 많이 나온 세금을 두고 세무서로 가 정보부 놈들이 남편을 죽였는데 이거 신고할 정신이 어디 있었겠냐고, 받으려면 그놈들한테 받아내라고 소리치는 강순희의 '깡'은 남편에 대한 사랑에서 나왔다고 강순희는 말한다.
유시민 :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설쳤던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싸우셨다는데, 그 무서웠던 시절에 그렇게 싸울 힘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강순희 : 남편을 사랑했으니까. 그건 뭐, 말할 필요도 없죠. 그 사람 없이는 못 살 것 같았어요. 내 숨이 끊어질 것 같았어요.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그 힘으로 그렇게 쫓아다닌 거였겠지. …. (194쪽)
특히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오래 남는 장면이 있는데, 강순희가 동우엄마(고 이수병의 아내 이정숙), 민환엄마(고 김용원의 아내 유승옥)와 함께 경북 영덕으로 여행을 떠난 이야기이다. 남편들이 사형을 당하고 몇 년 뒤, 사형수의 아내 셋이 모여 나이를 더 먹으면 수영복을 못 입으니 마지막으로 입자며 경북 영덕의 바닷가로 여행을 떠나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사진을 보지 않으면 사실 잘 상상이 안 되는 장면이다. 250쪽에 등장하는 사진 두 장은 내가 우리 엄마의 오래된 사진첩에서 본 사진과 같았다. 법정과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싸우던 사람들이 가방 하나 짊어지고 기차역 플랫폼 바닥에 주저앉아 미소를 띠고 있고, 모래사장 위에 수영복을 입고 찍은 여행 인증샷은 멋있어 보인다. '인혁당 사형수의 아내'로만 생각되던 여성들이 자신들만의 연대로 위로와 치유를 하고, 서로가 힘이 되며 인생을 함께 살아내는 동지이자 친구로서 여행도 함께 떠나는 '단짝'이 된 것이다.
어쩌면 누구보다도 굴곡진 인생을 살았을 강순희.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의 눈으로는 강순희의 삶이 '불행'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강순희는 최선을 다했으니 여한이 없다고 말한다. 사람마다 다른 행복의 기준 앞에 행복했다 혹은 불행했다고 딱 잘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살았으니 만족한다고 말하는 그의 한 마디에 이 책을 읽는 나도 깊은 위로를 받는다.
아무 여한이 없어요. 오늘 밤에 죽는다 해도 괜찮아. 남편 일로 좀 힘들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까. 신랑도 잘 만났고, 사랑도 잘 했고, 남편 일로 싸울 때도 잘 싸웠어요. 자기한테 주어진 것을 극복하면서 사는 게 인생이잖아요. 나한테 주어진 환경과 조건에서 내 힘껏 노력하고 살았어요. 최선을 다했어요. 남편 죽었을 때는 막 같이 죽고 싶었지. 그런 생각이 든 순간이 여러 번 있었어. 그렇지만 아이들을 위해 살아야겠다 싶어서 고비를 넘겼어요.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262쪽)
지난 90여년을 함께 한 여러 정체성의 순희들은 아흔셋 강순희에게 "순희야! 네 인생 정말 멋져! 참 잘 살았어"라고 말할 것만 같다. 인혁당 사형수의 아내 강순희만이 아닌, 당차게 깡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인생을 일군 여성으로서, 한 사람으로서의 강순희의 삶은 여전히 반짝반짝 빛이 난다. 동우엄마, 민환엄마와 떠난 여행에서 만났을 바다 위의 윤슬처럼, 그리고 우홍선과 첫 데이트를 하던 범어사에서 마주쳤을 그의 눈빛처럼 말이다.
이 책은 '인혁당 사형수의 아내'라는 껍질로 꽁꽁 싸매였던 '인간 강순희'가 껍질을 깨고 나와 각자 저마다의 인생을 살아내고 있는 독자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책이다. 동시에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우홍선에게 보내는 긴 러브레터이기도 하다. 강순희는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내며 사랑을 증명했고, 그 증명을 통해 우리는 위로를 받으니 우린 다시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가면 될 것이다.
아흔셋 강순희. 당신의 삶, 정말 아름답습니다. 진심을 담아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 강순희 말하고 유시민 듣다
유시민, 김세라 (지은이),
은빛,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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