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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넘어 처음 '자기 홍보'해 본 사람이 꽂힌 한 문장

[리뷰] 천지수 작가의 <책 읽는 아틀리에>를 읽고

등록 2026.07.06 14:29수정 2026.07.0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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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살을 막 넘길 무렵, 위기가 찾아왔다. 몸에 이상이 발견된 것이다. 다행히 조기에 발견해 큰 수술은 피할 수 있었지만, 이후 오랜 시간 경과를 지켜봐야 했다. 몸의 이상을 알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누구보다 뜨겁게 나의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병을 알게 된 뒤 그 마음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더 이상 일에 집중할 수 없었고, 결국 회사에 사직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회사는 사표를 수리하는 대신, 월급을 줄이더라도 자유롭게 근무할 수 있도록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 그때의 고마움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뜻밖에 나만의 시간이 생겼다. 난생 처음 배우고 싶은 것이 생겼는데, 그게 그림이었다.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나는 그림을 배우기만 하면 잘 그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글은 제법 썼으니, 글과 그림은 같은 재능에서 자라는 예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연필화 수업을 등록했다. 선 긋기부터 시작한 수업은 처음에는 재미있었다.

하지만 한 달쯤 지나니 흥미가 떨어졌다. 생각보다 그림을 배우는 일이 훨씬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3달 과정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중단하고야 말았다. 그때부터였다. 글과 그림, 두 개의 예술을 자유롭게 다루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과 부러움이 앞섰다. 신이 특별한 재능과 임무를 함께 내려보낸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페인팅 북토크'에 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는 법

지난 6월 초, 김성신 출판평론가에게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경기도서관에서 열리는 '천지수의 페인팅 북토크' 안내였다. '페인팅 북토크'라는 말이 낯설었다. 천지수가 누구인지 찾아보니, 한 권의 책을 읽고 글과 그림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독후화'를 꾸준히 작업해 온 화가이자 작가였다.

누군가의 책을 읽고 글로 남기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것을 그림으로까지 표현한다니. 그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을 꼭 만나보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북토크는 주말이었다. 도서관에서 일하는 나에게 주말은 가장 바쁜 날이기에 도저히 휴가를 낼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대신 그녀가 쓴 <책 읽는 아틀리에>(2021년 6월 출간)를 펼쳤다.


책 읽는 아틀리에 표지
▲책 읽는 아틀리에 표지 이인자

솔직히 '머리말'을 읽기 전까지는 그녀의 본업이 화가인 만큼, 그림에 더 마음을 빼앗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말을 읽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글이 너무 좋았다. 그녀는 붓이 무기처럼 발끈하고 묵직해지는 순간을 이야기했는데, 그 문장을 읽는 동안 나는 그녀가 붓끝뿐 아니라 펜 끝까지 묵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기 이야기를 놓쳐 본 사람의 고백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나니, 아쉬웠던 건 오히려 그림이었다. 아무리 좋은 종이에 정성껏 인쇄했다 해도 원화의 질감과 색감, 붓의 결까지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는 내내 '이건 책으로 볼 그림이 아니라, 전시장에서 직접 마주해야 할 그림이구나' 하는 생각에 그녀의 전시회가 또 언제 열리는지 인터넷을 뒤적 거렸다.

책 속에는 53권의 책을 읽고 남긴 글과 그림이 실려 있었다. 소설부터 인문서까지 장르도 다양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내 마음에 꽂힌 책은 지평님 작가의 에세이집 <다행히 나는 이렇게 살고 있지만>이었다.

"누군가에 등 떠밀린 인생이 아니었다. 내가 좋아서 선택한 직업이고, 많은 날을 변태적일 만큼 짜릿한 기쁨에 취해 일했다."

이 문장을 천지수 작가가 끄집어내는 순간, '맞아, 나도 그랬지' 하는 공감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지평님 작가는 30년 넘게 책을 만든 편집자다. 배우들의 열연을 객석에서 바라보는 '나른한 구경꾼'으로 살아왔지만, 그 역할이 싫지 않았다고 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자기 이야기를 놓쳐버린 사람들의 소중한 증인이 되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그 대목에서 천지수 작가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듯했다. 그녀 역시 자기 이야기를 놓쳐버린 한 사람이었다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 역시 지금은 도서관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되었지만, 오랫동안 홍보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내가 몸담은 회사와 윗사람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데 평생 힘을 쏟았다. 정작 내 이야기는 뒤로 미뤄 둔 채 말이다. 오십이 넘어서야 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고, 처음으로 나 자신을 홍보하는 사람이 되었다. 언제나 객석에 앉아 있던 내가 어느새 무대 위에 서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를 쓰면 쓸수록, 나 자신을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언젠가는 멈춰야 할 과한 욕망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잠을 자다가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문장을 생산해야 할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하지만 지평님 작가가 말한 대로, 천지수 작가가 공감한 대로 누군가에게 등 떠밀린 인생이 아니었다. 내가 좋아서 선택한 길이었다. 그러니 이 불안 또한 내가 감당해야 할 짜릿한 책임일지도 모른다.

김탁환 작가의 <거짓말이다>를 읽고 그린 독후화 역시 마음에 깊이 남았다. 세월호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인데, 보이지 않는 바닷속에서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품에 안고 올라오는 잠수사의 마음이 천지수 작가의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꽃잎처럼 보였던 형상은 서로를 끌어안은 사람들이었고, 그 포옹은 슬픔보다 더 큰 사랑으로 다가왔다. 마음 한편으로는 믿을 수 없었던 그날이 떠올라 방울토마토 하나가 목에 걸린 듯 괴로웠다.

1권의 책이 아니라, 53권의 책을 읽은 듯한 느낌

그림에 대해서는 정말 문외한이라 그녀의 그림을 평할 줄은 모른다. 다만 아프리카에서 생활했다는 그녀의 이력 때문인지, 종이 위에 인쇄된 그림에서조차 원색의 강렬한 생명력과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함께 느껴졌다.

이 책을 읽고 나면 1권이 아니라 마치 53권의 책을 읽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당분간 책을 읽지 않아도 배부를 것 같지만, 그 착각은 잠시 뿐이다. 이내 53권의 리스트 중 읽고 싶은 책들을 도서관 검색대에 부지런히 불러오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비록 '페인팅 북토크'에는 가지 못했지만, <책 읽는 아틀리에> 덕분에 독후화라는 새로운 예술을 만났다. 그림과 글, 두 분야의 재능과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장르이기에 대체 불가능한 그녀의 존재감이 부럽기도 했다. 언젠가 그녀의 원화 앞에서, 그녀의 붓이 무기처럼 묵직해지던 그 순간을 온몸으로 마주해보고 싶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책 읽는 아틀리에 - 나를 열고 들어가는 열쇠

천지수 (지은이),
천년의상상, 2021


#천지수 #책읽는아틀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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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광고 홍보인. 지금은 도서관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감동적인 글로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습니다. 2025 경기히든작가 당선, 책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 '삶은 도서관'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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