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르가못 향기가 뿜뿜 풍기는 얼그레이 찻잎
노시은
산에서 내려와 무거워진 몸을 샤워로 단정히 하고 찻자리에 앉았습니다. 여전히 물 속에 잠긴 느낌이네요. 이런 날엔 꿉꿉함을 단번에 날려줄 존재감이 확실한 차를 마셔주기로 하고, 주저 없이 꺼내 드는 것은 바로 얼그레이(Earl Grey) 홍차입니다.
얼그레이라니 왠지 은쟁반과 삼단 트레이가 놓인 영국식 애프터눈 티가 떠오릅니다. 백작의 이름까지 붙어 있으니 당연히 영국 토박이 차라고 생각하기 쉽죠. 하지만 이 차의 고향은 다름 아닌 중국입니다.
1830년부터 1834년까지 영국 수상을 지낸 그레이 백작 2세, 찰스 그레이가 중국에 파견한 외교 사절이 우연히 한 청나라 관원의 목숨을 구해주었고, 은혜를 입은 관원이 맛이 뛰어난 차와 그 배합 비법을 백작에게 보내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거든요.
이 차에 푹 빠진 백작은 늘 자신의 차 상인에게 똑같이 배합해 달라 부탁했고, 훗날 가문이 시판을 허락하면서 얼그레이는 백작의 이름을 달고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지금도 세계의 적지 않은 브랜드들이 중국산 홍차를 바탕으로 얼그레이를 만들고 있으니, 이 차의 족보는 여전히 동쪽을 가리키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차의 역사에 관심 많은 전문가들은 이 아름다운 이야기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당시 중국에는 베르가못이라는 과일 자체가 없었고, 그레이 백작은 평생 중국 땅을 밟은 적도 없으니까요. 일각에서는 왕실의 지시로 만들어졌다는 소문도 있지만, 역사적 진실은 조금 더 실용적입니다.
당시 영국 귀족들은 중국에서 건너온 최고급 훈연차인 '정산소종(正山小種)'이나 감귤류 꽃향을 덧입힌 가향차에 열광했습니다. 그레이 백작 역시 선물 받은 훌륭한 중국 차의 향미를 잊지 못해 런던의 차 상인에게 그 맛을 재현해 달라고 의뢰했죠.
동양의 독특한 제다 기술이나 향료를 구할 길 없던 영국 상인들이 고육지책으로 이탈리아산 베르가못 오일을 짜 넣은 모방품을 만들어 낸 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추정입니다.
하지만 전설과 모방의 진위와 무관하게 확실한 사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런던의 차 상인들은 서로 자기네가 백작에게 차를 배합해 준 '원조'라며 백 년 넘게 자존심 싸움을 벌였고, 정작 그레이 가문은 상표 등록을 하지 않은 탓에 이 세계적인 차로 한 푼도 벌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부인의 이름을 딴 '레이디 그레이'까지 나와, 백작 부부는 나란히 찻잔 속에 살게 되었다는 것이죠.
생전의 그레이 백작은 선거법을 개정하고 노예제 폐지의 길을 연 묵직한 정치가였습니다만, 후세는 그를 법안이 아니라 찻잎의 이름으로 기억합니다. 역사란 가끔 이렇게 얄궂은 유머를 부리죠. 그러니 이 차 앞에서는 "담장 안에 핀 꽃이 담장 밖에서 더 향기롭다"는 옛말이 절로 스쳐 지나갑니다. 동양에서 나고 자란 찻잎이 서양 귀족의 이름표를 달고 세계를 여행하게 되었으니, 차의 팔자도 사람의 팔자만큼이나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얼그레이의 심장은 뭐니 뭐니 해도 베르가못입니다. 흔히 한자로 불수감(佛手柑)이라 옮기지만, 실은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의 뜨거운 햇살 아래서 자라는 시트러스 과일이죠. 그러니까 이 차 한 잔에는 중국의 찻잎과 지중해의 향과 영국의 이야기가 함께 우러나 있는 셈입니다. 장마에 갇혀 어디에도 가지 못하는 처지에, 찻잔 하나로 세 대륙을 건너는 호사라니요.
습한 장마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맛

▲ 빈티지 잔에 얼그레이 홍차를 마시는 호사를 나에게 허락한 오후의 티타임
노시은
오늘의 찻자리는 장마의 회색빛에 맞서기라도 하듯 온통 푸른 빛입니다. 금테를 두른 코발트빛 티포트, 그 곁에 목을 우아하게 구부린 백조 모양의 슈가볼, 그리고 흰 바탕에 푸른 꽃무늬가 짙게 앉은 청화 찻잔. 티포트에 뜨거운 물을 붓고 삼 분, 도르르 말려 있던 찻잎이 풀리면서 붉고 맑은 차탕이 우러납니다.
푸른 꽃 만발한 잔에 따르니 붉은빛은 한층 깊어지고, 차탕 가장자리로는 금빛 테두리가 찰랑이죠. 그리고 그 위로 베르가못 특유의 뾰족하고 맑은 시트러스 향이 경쾌하게 치고 올라옵니다.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홍차가 몸을 데우고 보한다고 여겨왔지만, 한여름 무더위 속에 순수한 홍차만 마시기엔 조금 무겁고 달착지근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럴 때 홍차 특유의 부드러운 윤택함에 베르가못의 산뜻한 향을 입힌 얼그레이는 참으로 영리한 선택입니다. 첫 모금에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고, 두 번째 모금에 코끝을 찌르는 맑은 향기가 장마철의 지루함과 짜증을 한 번에 씻어내 줍니다. 창밖의 빗소리마저 이 순간만큼은 배경음악처럼 근사하게 들리니, 향 하나가 부리는 조화가 놀랍기만 하죠.
서랍을 열어 제가 가장 사랑하는 속세의 티푸드도 꺼내 듭니다. 비스킷 위에 도톰한 밀크초콜릿이 판판하게 얹히고, 초콜릿 면에는 그림까지 곱게 양각됐어요. 청화 무늬 접시에 올려놓으니 제법 다식 대접을 받는 얼굴이 되었네요.
한 입 베어 물면 초콜릿이 톡 갈라지며 바삭한 비스킷이 부서집니다. 아, 이 얼마나 경쾌하고 달콤한 부서짐인가요. 쌉싸름하고 맑은 베르가못 향이 입안을 훑고 지나간 자리에, 꾸덕한 초콜릿의 단맛과 비스킷의 고소함이 빈틈없이 밀려듭니다. 차 한 모금, 비스킷 한 입. 다시 차 한 모금.
무궁화 피고 지는 숲길을 걷고 돌아와 마시는 이 달콤 쌉싸름한 한 잔의 차 시간 덕분에, 꽤 길고 축축할 이번 장마도 너끈히 건너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여름의 꽃, 능소화도 부록으로 감상하시길
노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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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배낭 속의 영국 남자』, 『언제라도 티타임』, 『화요일의 티타임』의 저자. 세상 구경하고 차 마시며 글, 사진, 영상, 그림으로 삶을 기록합니다. 아직은 벌이가 시원찮은 유튜버지만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는 진심입니다. 좋은 기획과 재미있는 작업 제안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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