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을 앞두고 알게 된 '오래 좋아하는 마음'의 힘

[리뷰] <무정형의 삶>을 읽고

등록 2026.07.09 15:28수정 2026.07.09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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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언제부터 좋아하는 것보다 해야 하는 일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가게 될까.

쉰을 지나고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젊은 날에는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사람을 향해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 하지만 시간이 쌓일수록 책임이 앞서고, 해야 할 일이 우선이 된다. 가족을 위해, 일상을 지키기 위해 애쓰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잊고 살아갈 때가 있다.


김민철 작가의 <무정형의 삶> (2024년 7월 출간)은 그런 나에게 오래된 질문 하나를 건넨 책이다.

마음껏 좋아하는 것

김민철 작가는 20년간 광고 회사에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문장을 만들어온 카피라이터 출신 에세이스트다. 20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그는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온 도시 파리로 떠났다. 그리고 두 달 동안 그곳에 머물며 지금까지의 여행과는 다른 속도와 방식으로 일상을 살아냈다.

그의 글에는 특별한 사건보다 평범한 순간을 오래 바라보는 힘이 있다. 익숙한 하루 속에서 작은 기쁨을 발견하고, 마음을 움직인 장면을 자신만의 언어로 기록한다. <무정형의 삶>은 좋아하는 도시 파리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의 감각을 다시 찾아가는 작가의 기록이자,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담긴 책이다.

제목처럼 이 책은 일정한 틀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다. 파리를 사랑하는 한 사람의 기록이지만 단순한 여행 에세이에 머물지 않는다. 유명한 장소를 얼마나 많이 방문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 아니라, 한 사람이 한 도시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파리의 골목과 오래된 빵집, 카페와 거리 풍경 속에서 작가는 '내가 원하는 모양의 삶'을 천천히 빚어간다.


작가는 파리에서 보내는 평범한 하루를 특별하게 바라본다. 오래된 빵집에 들르고, 천천히 거리를 걷고, 우연히 마주친 풍경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남들이 지나칠 수 있는 순간에 마음을 기울이고, 그 시간을 기록한다. 그렇게 쌓인 평범한 순간들이 한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저자가 미술관에서 작품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는 많은 작품을 빠르게 감상하는 것보다 한 작품 앞에 오래 머무르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품과 마주하는 시간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림을 정해진 해석이나 정답으로 이해하려 하기보다, 작품이 자신의 마음속에 어떤 감정과 생각을 불러일으키는지 천천히 살펴본다.


이러한 태도는 마티스 전시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에서 더욱 깊게 느껴졌다. 저자는 "그림 속 세계에는 옳고 그름이 없었다. 다만 화가의 선택이 필연이 될 뿐이다"(133쪽) 라고 말한다. 이는 예술이 정해진 기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창작자가 자신의 세계 안에서 발견한 의미를 표현하는 일임을 보여준다.

책표지 무정형의 삶
▲책표지 무정형의 삶 위즈덤하우스

또한 "나만의 세상 속에서 나만의 빛남을 쟁취해나가는 세상"(133쪽)이라는 그의 생각은 작품을 감상하는 일 역시 타인의 기준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만의 감각과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임을 깨닫게 한다. 결국 미술관에서 보내는 시간은 단순히 그림을 보는 시간이 아니다. 한 작품을 통해 화가의 세계와 만나고,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시간이다. 작가가 마티스의 작품에서 발견한 '나만의 필연을 찾아가는 여정'은 나에게도 예술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열어 주었다.

그 깨달음은 결국 삶을 바라보는 태도로 이어졌다. 그래서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문장은 이것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해 버리는 것은 참 귀한 능력이라고."
- 334 쪽

짧은 문장이지만 오래 생각하게 했다.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는 일도 쉽지 않다. 하지만 그 마음을 오래 지켜내는 일은 더 어렵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설레고, 기꺼이 시간을 내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꾸만 마음이 향하는 것.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재능이며 용기인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나의 삶을 지탱해 준 것은 거창한 성공이 아니었다. 좋은 책 한 권과 마주했던 시간, 마음에 남은 문장을 오래 곱씹던 순간,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걷던 산책길과 산행의 발걸음, 그리고 조용한 오후에 글을 쓰며 나 자신과 마주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런 작고 평범한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루고,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일일지 모르지만, 그런 순간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무정형의 삶>을 읽으며 깨달았다.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거대한 행복만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오래 마음을 기울이고 아껴 온 작은 순간들이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

작가가 파리를 사랑하는 방식은 결국 삶을 사랑하는 방식과 닮아 있다. 좋아하는 치즈를 맛보고 조금씩 사는 것, 같은 거리를 걸으며 새로운 풍경을 발견하고, 마음을 움직인 순간을 기록하는 일. 그것은 특별한 사람이 누리는 특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의 하루를 소중히 바라보는 사람이 만들어가는 삶이다.

또 하나 오래 남은 문장이 있다.

"나 역시 운명이라 믿기를 좋아한다. 나쁜 일이 들이닥칠 때 운명이라 생각해버리면 금방 체념이 되면서 나는 한낱 작은 인간일 뿐인데 받아들여야지, 나아가야지. 이겨내야지." (48쪽)

이 문장은 삶을 포기하는 태도가 아니라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읽혔다. 살다 보면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젊은 날에는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해결하려 애썼지만,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된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다시 걸어가기 위한 힘이라는 것을.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은 내려놓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 어쩌면 그것이 시간이 준 가장 큰 배움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삶에는 정답이 없다. 누군가 정해 놓은 기준에 맞추는 삶보다 내가 원하는 색으로 살아가는 삶이 더 나다운 삶일 수 있다.

나는 무엇을 오래 사랑하고 있는가

책장을 덮고 책 속에 담긴 아름다운 파리의 사진 풍경들을 천천히 바라보며, 한동안 잊고 지냈던 마음의 결들을 천천히 떠올렸다.

내가 좋아했던 책들, 아무 목적 없이 천천히 걸었던 길들, 일상의 작은 순간마다 나를 미소 짓게 했던 사소하지만 소중한 취향들까지. 그 모든 것들이 지나간 기억이 아니라 여전히 내 안에 머물러 있는 나만의 빛나는 순간들이었음을 느꼈다.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많은 것을 잃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끝까지 품고 가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마음은 늙지 않는다. 예순을 바라보는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이루는 일이 아니라, 오래 좋아하는 마음을 지켜내는 일이라는 것을.

<무정형의 삶>은 그 다정한 진실을 파리의 골목과 미술관, 그리고 평범한 하루 속에서 조용히 보여주는 아름다운 기록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무정형의 삶 (양장) - 김민철 파리 산문집

김민철 (지은이),
위즈덤하우스, 2024


#무정형의삶 #김민철작가 #좋아하는마음 #파리이야기 #책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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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를 읽고, 글을 씁니다.나이 들어가는 삶의 감각과 가족. 부부의 시간, 일상에서 건져 올린 생각들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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