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군체> 촬영 현장.
쇼박스
좀비에게 집단지성이라는 AI적 특성을 부여해 공포를 만든 감독이, 정작 AI 기술 자체를 긍정한다는 점은 얼핏 모순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연 감독이 꼽은 회심의 장면 탄생 과정을 보면 그 기술을 사용하면서 추구해야 할 가치를 엿볼 수 있다. 연 감독은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앤트밀(Antmill, 개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소용돌이 현상) 장면을 예로 들었다. 그는 "우리가 남녀 기호를 보고 화장실임을 알 듯 영화에서도 딱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될 수 있는 게 중요한데 바로 그 장면이었다"고 강조했다.
서영철의 계략으로 건물 안에 갇혔던 좀비들이 결국 외부로 쏟아져 나오고, 근처 시민들이 대거 감염되며 현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상태가 된다. 그들이 체액을 통해 소통하는 걸 간파한 권세정은 그것을 온몸에 바른 채 좀비 군체 틈으로 파고든다. 알파 좀비, 즉 최초로 바이러스를 감염시킨 존재를 제거하기 위해서다. 이 과정에서 좀비들은 하나둘 혼란에 빠지며 세정을 공격하는 게 아닌 그를 중심으로 큰 원을 그리며 무한 회전하다가 이내 한꺼번에 쓰러지고 만다. 공유된 정보가 오염되자, 서영철이 그들을 다시 리셋(reset)시키기 위해 택한 방식이다. 그 덕에 세정은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상황을 끝낼 기회를 얻게 된다.
"그 앤트밀 장면은 초기 기획 단계에선 없었다. 촬영을 앞두고 투자 배급사인 쇼박스 측에서 제안한 아이디어였다. 사실 <부산행>에서 기차에 좀비가 끌려가는 장면도, 촬영 중간에 우연처럼 나온 것이었다. 앤트밀도 우연의 산물었지만, 좀비를 재부팅하는 이미지에 딱이었다. 이게 AI의 집단지성과는 다른 점이다. AI가 이미 나온 정보들이 한데 뒤섞인 결과에 기반한다면, <군체>의 그런 장면은 오히려 소수의견을 반영한 결과잖나. 그 장면을 통해 집단화된 존재들이 보이는 맹목성의 위험, 그것의 오류를 말하고 싶었다.
현대무용의 군무 중에 신호를 주면 맴돌던 사람들이 한 번에 쓰러지는 설정이 있다. 근데 좀비 연기를 하며 넘어진다는 게 되게 위험한 일이었다. 원형으로 달리는 속도도 매우 빨랐는데 시야도 제한되거든. 안무팀은 물론이고 국내에서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스턴트 배우들을 모았던 것 같다. 한 40명 정도였다. 실제 촬영은 이들이 넘어지는 것만 찍었고, 나머진 CG의 도움을 받았다."
이 대목에서 연 감독은 극 중 권세정이 차를 운전하며 좀비를 이리저리 치는 장면은 거의 실제로 찍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반도> 땐 CG로 했던 카체이싱 장면과 달리 이번엔 스턴트 배우들과 함께 실제로 운전하고 차에 부딪히게끔 했다"고 설명했다.
"전지현 배우가 운전석에 타고, 그 옆에서 스턴트 배우가 실제로 운전하게끔 했다. 이것을 위해 우측 자리에도 핸들이 있는 특수차를 제작했다. <계시록>을 촬영할 때 처음 시도한 건데 CG로 나중에 우측은 지울 수 있거든. CG로만 처리했을 때와 실제 연기를 함께 넣을 때와 현실감이 완전 다르더라. 하지만 이게 자칫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서 배우들끼리 엄청 연습했다. 촬영 직전, 반나절을 내내 합을 맞춰야 했다."
연 감독은 "해당 장면이 나오기까지 전영 안무감독과 유미진 무술감독의 공이 컸다"고 짚었다. 전 안무감독은 <부산행>, 드라마 <킹덤> 등에서 좀비 동작을 고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유 감독에 대해 연 감독은 "국내에선 거의 유일한 여성 무술감독"이라며 "액션 현장이 위험해서 종종 고성이 오가기 마련인데 그는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통솔한다. <군체>가 난도 높은 현장이었음에도 단 한 번의 사고도 난 적이 없다"고 전했다.
영화계 보부상을 꿈꾸며

▲ 영화 <군체>를 연출한 연상호 감독.
쇼박스
총제작비 200억 원대의 <군체>는 해외 선판매와 국내 흥행으로 이미 손익분기점을 넘긴 상황. 거의 매년 작품을 발표해 온 연 감독을 두고 일각에선 다작 감독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이게 가능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거대 예산이 들어가는 블록버스터, 넷플릭스 시리즈를 하면서도 그는 틈틈이 저예산 영화와 독립 애니메이션을 기획하고 제작해 왔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얼굴>은 2억 원으로 완성한 장편이고, 곧 개봉할 <실낙원>도 5억 원 미만의 초저예산 영화로 알려져 있다. 연상호니까 가능한 프로젝트라고 반박할 수도 있지만, 기성 감독이 이처럼 극과 극의 규모를 오가며 작업하는 경우는 드물다.
"흔히 지난 20년을 두고 CJ나 롯데, 쇼박스, 뉴 등 4대 배급사 시스템의 시기라고들 하잖나. 그 시작이 김지운, 박찬욱, 봉준호 감독님이셨고 저도 <부산행>으로 상업영화를 시작했으니 어느 정도 거기에 걸쳐 있었다. 근데 제가 겪은 10년은 격변기였더라. 뭔가 안주할 수만은 없었다. 이젠 5년 단위로 시스템이 바뀌는 것 같다. 안주하고 싶으면서도 그럴 수 없는 이유다. 제 입장에선 계속 몸을 가볍게 할 수밖에 없더라. 영화계의 보부상 같다고 할까(웃음).
영화에서 몸이란 게 결국 프로덕션을 뜻하는데 이걸 가볍게 하지 않으면 변화에 적응할 수 없다. 미국만 봐도 대형 스튜디오들이 많이 무너지고, 이젠 제작사들이 각자 브랜드를 강화하고 있잖나. 저도 기성세대라 안주하고픈 마음도 있지만, 뭔가 시도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 그걸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 영화를 시작하는 분들이 그걸 빨리 인식했으면 좋겠다.
<챔프>, <아이큐점프> 같은 만화잡지가 사라지고 강풀 작가 등을 위시한 웹툰이 처음 나왔을 때 '그게 만화냐'라는 반응이 주였다. 근데 너무 빠르게 웹툰이 자릴 잡았잖나. 그걸 미리 인지하고 빠르게 산업화한 이들이 업계를 선점했다. 물론 지금은 웹툰도 무너지는 시기가 왔는데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적응, 재정립 과정이 빨라졌다는 걸 인지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모든 것엔 빈틈이 있다. 그 빈틈으로 빛이 들어온다.
공유하기
"'군체'의 앤트밀 장면, 소수의견 반영한 결과였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