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필사 책 표지
토트
76일 동안 손으로 생각하기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옛사람의 지혜'란 부제를 단 <고전필사>다. '손으로 생각하기'란 필사책을 꾸준히 출간해온 출판사 토트가 시와 감성글, 종교경전에 이어 동양고전을 재료로 낸 책이다. 한국과 중국 명사들의 글을 한 편에 싣고, 옆에는 독자가 직접 따라 적을 수 있도록 줄칸을 비워놓았다. 말과 행동, 관계의 기술, 도전과 의지, 배움의 즐거움, 벗과 함께 가는 길, 고독과 자족이라 이름 붙은 여섯 개 장 안에 각각의 주제에 맞는 문장들이 들어찼다.
저자는 고전문학가 박수밀이다. 한양대학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연암 박지원의 글을 바탕으로 고전과 관련한 책을 여러 권을 출간해온 작가이기도 하다. 그가 드넓은 동양 고전의 세계를 오가며 '인문적 소양을 갖춘 리더'에게 걸맞은 글귀를 가려 뽑아 실었다. 시간은 많은 것을 달라지게 한다지만, 인간사 어떤 문제는 시간을 초월해 있다. 무지막지한 연산속도를 자랑하는 실리콘 트랜지스터가 문명의 규모를 전과 달리 만들어 놓았대도, 우리는 여전히 효와 사랑을, 우정과 신뢰를 고민한다. 삶을 꾸려가는 자세를 생각하고, 시비를 분별하려 한다. 책에 실린 많은 글은 같은 고민 끝에 닿은 선현의 성취다. 삶으로 써낸 글이 오늘과 닿아 이루는 변화가 분명하다.
<명심보감> <논어> <맹자> <도덕경> <전국책> <사기> <대학> <채근담> <노자> 등 중국 고전이 다수를 이룬다. 이이, 권근, 이순신, 김충선, 윤형로, 박제가, 김구 등 고려와 조선,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위인들의 글도 또한 실려 있다. 어느 것은 책으로 따로 편찬된 것이지만, 문집이나 일기, 가훈에 기록된 것도 여럿이다. 각 장의 주제에 따라 뽑은 문장이 원문과 번역으로 나란히 제시되며, 이따금 저자의 짤막한 첨언이 달린다.
이를테면 김충선의 가훈을 보자.
"남이 잘하는 점이 있으면 드러내 주고 남이 잘못하거든 덮어주어라. 남이 내게 대들어도 맞서지 않고 남이 나를 비방해도 말없이 참는다면 대들던 사람이 스스로 부끄러워하고 비방하던 자도 스스로 그만둘 것이다." - 18페이지
아는 이는 알겠으나 김충선은 유명한 항왜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조선으로 귀화해 싸운 무인 중 대표격이다.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으로 조선땅을 밟았던 그는 개전 초기 항복의 뜻을 밝힌 서신을 경상도 병마절도사에게 보내고 선조의 허가가 떨어지자 휘하의 무인 500명을 이끌고 투항한다. 이후 조선에 조총을 보급하고 훈련시켜 그 피해를 크게 완화한 것은 물론, 양난에서 수십 차례의 전투를 치러내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사료가 되는 김충선의 <모하당문집>이 분실된 뒤 후손에 의해 재발간됐다는 점에서 사실관계가 의심되는 부분이 적잖으나 권율 등의 추천으로 무인으로 최고위직인 정2품 자헌대부까지 올랐단 사실은 그 공적이 컸음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어려움이 없었을까. 항왜는 언제고 돌아갈 수 있다는 의심 섞인 시선부터, 공을 세울수록 늘어가는 시기 섞인 태도, 중한 역할을 맡기지 않는 노골적 차별까지를 그는 말없이 견뎌야 했다. 유학에 관심이 깊었다는 김충선이 남긴 여러 문장 가운데 저자는 특별히 위의 글을 가져온다. 남의 잘하는 점을 드러내주고, 다른 이의 비방은 참아내라는 것. <논어> '안연'편의 유명한 문장이 떠오르는 글이 아닌가. 조선에서 예를 아는 격조 높은 가문을 일구고자 했다던 그의 가훈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유효한 가르침을 준다. 왜 아닐까. 우리 또한 자주 남의 못함을 발견하고, 나의 억울함과 당면하지 않는가.

▲고전필사 필사 기록
김성호
느리게 쓰는 작업이 이로운 이유
책에 실린 76편의 글이 모두 와 닿는 건 아니다. 저자의 취향이 담뿍 들어간 글들이 때로는 식상하고 당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같은 책 안에서도 왜 이런 글을 뽑았을까 아쉬움이 남는 순간도 여럿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필사>는 의미 있는 책이다. 그저 담긴 내용이 전부가 아닌 때문이다. 읽는 걸 넘어 필사하는 작업, 손으로 쓰는 것이 또 다른 감흥을 안기는 덕분이다. 이 책을 포함한 시리즈의 제목, '손으로 생각하기'란 말 그대로다. 뇌의 속도를 따르지 못하는 손, 그 손으로 천천히 쓰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생각이 분명히 존재한다. 손으로 생각한다는 건 바로 이를 일컫는 말일 테다.
효율을 추구하며 빠르게 내달릴 때는 보이지 않는 풍경이 천천히 나아갈 때는 보이는 법이다. 때로는 생각이 앞질러서 글자를 잘못 적은 뒤 죽죽 줄을 긋기도 한다. 마음이 어지러울 땐 펜이 마구 뻗어나가 글씨가 정돈되지 못하기도 한다. 읽기만 할 땐 들여다보는 일 드물었던 읽는 나의 마음을 필사를 하면서는 수시로 들추어 본다. 쓰기 전에 먼저 마음을 가다듬는 순간도 잦다.
말하자면 독자는 책과 마주하여 읽는 자신을 먼저 바라봐야 한다는 사실을 <고전필사>가 깨우치게 한다. 독서는 작가의 글을 일방적으로 흡수하는 작업이 아니다. 작가와 독자가 함께 추는 춤이다. 내 자세가 좋은 독서의 전제다. 더없이 중요한 그 사실을 나는 얼마나 자주, 또 쉽게 무시하고 있었던가.
<고전필사> 76일의 여정을 마치고서 나는 신중하게 다음 책을 고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미덕 또한 단련되는 것이다. 필사가 가진 이로움도 그와 같다고 믿는다. 천천히 쓰고 오래 생각하는 일이 범람하는 정보 사이를 스치듯 지나는 일상 가운데 귀한 미덕을 이룰 수 있으리라 여긴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내게 좋은 것이 당신에게도 좋으리라고 권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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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GV, 강의,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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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일 동안 손으로 썼다... 그랬더니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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