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나는 반도체 공장 부지에 내리는 빗물을 새로운 수원으로 활용하는 레인팹(Rain Fab)을 제안했다(관련 기사: 반도체 공장 부지에서 수원을 찾자, '레인팹'을 제안한다 https://omn.kr/2j0vj).
공장 지붕에 내리는 깨끗한 빗물은 공정용수의 원수로, 도로와 주차장에 내린 빗물은 조경과 청소 등 기타용수로 활용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레인팹은 단순한 빗물이용 기술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업이 물을 바라보는 철학을 바꾸는 것이다. 이제 기업은 물을 사용하는 주체를 넘어 물순환을 함께 책임지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물순환 책임의 첫걸음은 물 절약이다
2001년 김대중 정부는 세계 최초로 수도법에 빗물이용시설을 제도화하며 물수요관리(Demand Management)라는 새로운 철학을 제시했다. 부족하면 더 개발하는 공급 중심 정책에서 벗어나, 먼저 절약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기후위기 시대가 된 지금도 그 철학은 여전히 유효하며, 오히려 더 큰 의미를 갖는다.
반도체 산업은 많은 물을 사용하는 산업이다. 그렇다고 해서 물이 부족할 때마다 더 많은 용수를 공급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먼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기업은 스스로에게 먼저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정말 물을 최대한 아끼고 있는가?' 제품 하나를 생산하는 데 사용하는 물의 양, 즉 원단위(Unit Water Consumption)를 줄이기 위해 얼마나 투자하고 있으며, 얼마나 개선하고 있는가. 모든 공정을 공개할 필요는 없지만, 사회는 기업이 물 절약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어야 한다.
공장으로 들어오는 물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 새로운 수원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들어가고, 다른 지역의 물을 산업용으로 배분해야 할 수도 있으며, 먼 곳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와 전력이 소비된다.
물을 공급받는다는 것은 사회의 도움을 받는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더 많은 물을 요구하기 전에 더 적게 사용하는 기술과 노력을 먼저 보여주는 것, 그것이 물순환 책임의 첫 번째 원칙이다.
공장이 바꾼 물순환도 함께 책임져야 한다
기업의 책임은 절약에서 끝나지 않는다. 공장이 들어서면 숲과 논, 밭은 지붕과 도로, 주차장으로 바뀌고, 가장 먼저 달라지는 것은 물순환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빗물의 상당 부분이 땅으로 스며들어 지하수를 채우고 천천히 하천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불투수면이 늘어나면 빗물은 대부분 짧은 시간 안에 배수로를 따라 하류로 흘러간다.
이 과정에서 유출계수(Runoff Coefficient)는 크게 증가한다. 집중호우가 내리면 하류의 홍수 위험은 커지고, 반대로 땅속으로 스며드는 물은 줄어들어 지하수 함양은 감소한다. 만약 공장에서 지하수까지 이용한다면 지하수위는 더욱 낮아질 수 있다.
지하수는 오늘만 사용하는 물이 아니라 미래세대가 함께 사용할 소중한 자산이다. 또한 지하수위가 낮아질수록 같은 양의 물을 퍼 올리는 데 더 많은 전력이 필요해져 에너지 소비도 증가한다.
이러한 변화는 공장 울타리 밖에서 나타나지만, 그 원인은 공장 부지의 개발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기업은 물을 사용하는 책임뿐 아니라 공장 부지가 바꾼 물순환까지 함께 책임져야 한다. 레인팹은 바로 이러한 책임을 실천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공장에 내리는 빗물을 가능한 한 현장에서 저장하고 활용하면 새로운 수원을 확보할 뿐 아니라, 하류의 홍수 부담도 줄이고 지하수 회복에도 기여할 수 있다.
물순환을 책임지는 기업이 세계를 선도한다
물순환이 바뀌면 홍수만 커지는 것이 아니다. 폭염도 함께 심해진다. 여름철 건물 옥상의 표면온도를 측정해 보면 50℃를 넘는 경우가 흔하다. 숲과 논은 햇빛 에너지를 물의 증발산에 사용하면서 주변을 식혀 주지만, 콘크리트와 철판으로 덮인 지붕은 그 에너지를 그대로 열로 바꾸기 때문이다.
새로 조성되는 반도체 산업단지가 약 250만 평이라면, 한여름에는 그 넓은 면적이 거대한 불판처럼 달궈질 수도 있다. 이것은 단순한 열섬현상이 아니라 물순환이 끊어진 결과이다. 빗물이 저장되고 증발하면 주변은 식지만, 빗물이 곧바로 흘러가 버리면 냉각 기능도 함께 사라진다. 결국 홍수와 가뭄, 지하수 감소와 폭염은 서로 다른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물순환 문제이다.
오늘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계속 확대되고 있다. 과거에는 오염을 줄이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탄소를 줄이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기후위기 시대에는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되어야 한다. 바로 물순환을 회복하는 책임이다.
기업은 돈을 버는 존재이며, 그것은 사회 발전에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지역의 물순환을 바꾸었다면 그 영향까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물을 절약하는 책임, 빗물을 관리하는 책임, 지하수를 보전하는 책임, 열환경을 악화시키지 않는 책임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미래 기업의 경쟁력이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은 이미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 이제는 물관리에서도 세계를 선도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많은 물을 사용하는 산업이 아니라, 더 적은 물로 더 높은 가치를 만들고, 자연의 물순환까지 함께 책임지는 산업. 그것이 기후위기 시대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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