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찾은 뜻밖의 상자, 거기서 나온 것

옛 편지들을 읽으며... 내가 그토록 사랑 받는 존재였다는 확인, 그 잊힌 기억을 다시 꺼내다

등록 2026.07.14 09:58수정 2026.07.14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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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천의 시골집
서천의 시골집 이보슬

약 4년 전, 어머니가 이사를 가며 시골 할아버지 댁에 옮겨둔 나의 짐이 있었다. 그 짐을 찾으러 지난 6월, 충남 서천으로 향했다. 먼지 쌓인 짐들 사이에서 뜻밖의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수십 년 전 가족, 그리고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옛날 편지 더미였다. 곰팡내가 짙게 밴 상자를 집으로 가져와 베란다 햇볕 아래 바짝 말렸다.

세찬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상자를 방으로 들여놓고도 한참을 열어보지 않았다. 과거의 기억이라는 것은 늘 유쾌하지만은 않기에, 설렘보다는 일종의 거북함이 앞섰다. 상자를 도로 연 것은 자정이 다 되어 퇴근한 어떤 밤이었다.


비로소 과거와 대면할 용기가 생겼던 것인지, 아니면 외롭고 피곤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상자를 열자, 유치원 시절 담임 선생님의 다정한 메모부터, 할아버지, 엄마, 이제는 서먹해져 연락조차 닿지 않는 옛 친구들의 편지까지, 낯선 기억들이 쏟아져 나왔다.

기억 속 어린 시절은 늘 쓸쓸하고 외로운 날들이 가득했는데, 편지에는 사랑의 문장들이 가득했다.

"넌 정말 소중한 존재야."
"날이 추우니 옷 단단히 입어라."

손으로 꾹꾹 눌러쓴 사소한 안부들은 번지지도 않은 채 선명했다.

낯설게 다가온 옛 편지 속 문장들


심리학과 뇌과학에서는 인간이 생존을 위해 긍정적인 기억보다 부정적인 기억과 상처를 더 자주 상기하고 강렬하게 각인한다고 설명한다. 이른바 '부정 편향(negativity bias)'이다. 원시시대의 생존방식이기도했던, 뇌의 이러한 방어 기제는 때로 과거를 실제보다 더 어둡고 외로운 것으로 왜곡하기도 한다.

기억이 왜곡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학문적으로 가장 집요하게 파고든 인물은 미국의 인지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다. 1993년, 그는 실험 참가자 24명에게 어린 시절 실제로 있었던 일화 세 가지와 함께,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은 '쇼핑몰에서 길을 잃었던 경험'이라는 가짜 일화 한 가지를 섞어 소책자로 만들어 읽게 했다.


이후 참가자들에게 각 일화를 최대한 자세히 떠올려 적어보도록 요청했다. 놀랍게도 상당수의 참가자는 일어난 적 없는 이 사건을 자신의 실제 기억처럼 구체적으로 재구성해냈고, 이후 확장된 후속 연구들에서는 평균적으로 참가자의 3분의 1가량이 실제로는 겪지 않은, 때로는 상당히 극적인 유년기 사건조차 자신의 기억이라 믿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편지들
편지들 이보슬

이른바 '쇼핑몰 미아 기법(lost in the mall technique)'으로 알려진 이 연구는 이후 다양한 변형과 확장을 거치며, 인간의 기억이 재생되는 과거의 필름이 아니라 매번 다시 쓰이는 이야기에 가깝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로프터스는 자신의 강연에서, 인간이 기억을 마치 녹화된 것을 재생하듯 사실 그대로 인출한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부정 편향이 '있었던 일을 더 아프게 저장하는' 방식의 왜곡이라면, 로프터스의 발견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있지도 않았던 일조차 실제처럼 새겨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결이 다르다. 방향은 다르지만 결론은 같은 곳을 향한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유년의 서사, 그중에서도 특히 외로움과 결핍의 기억은 상당 부분 이후의 감정과 해석이 덧입혀지며 재구성된 결과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편지 속 문장들이 낯설게 느껴졌던 것은, 그 시절이 실제로 사랑이 없던 시절이어서가 아니라 그 사랑을 기억이 오래도록 편집해왔기 때문일지 모른다.

기억은 왜곡되거나 흐려지지만, 종이 위에 남은 문장은 쉽게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진실을 지킨다. 과거의 내가 그토록 사랑 받는 존재였다는 확인은, 결국 지금의 나를 지탱하고 앞으로의 나를 더 신뢰하게 만드는 단단한 동력이 된다. 이 잊힌 시간들이 묵묵히 쌓여 있었기에 비로소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니 오늘은 서랍장에 넣어둔 오래된 사진이나 편지를 꺼내보는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 행여 그 편지나 사진마저 교묘하게 조작된 행복의 파편일지라도, 또 어떤가. 결국 불행도 행복도, 내가 선택하여 쓰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을 서사일 뿐이다.

 고인이 된 할아버지의 손편지
고인이 된 할아버지의 손편지 이보슬


#기억 #추억 #부정편향 #로프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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